양태자의 유럽야화-9세기의 전설적인 여교황 요한나
양태자의 유럽야화-9세기의 전설적인 여교황 요한나
  • 양태자 비교종교학 박사
  • 승인 2010.08.0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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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요하네스 8세
지금으로부터 1000년을 더 거슬러 올라 간 855년 어느 날 수많은 수행원들이 따르는 교황 요하네스 8세의 근엄한 행렬이 로마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갑자기 괴로운 신음을 내며 교황이 타고 있던 말에서 떨어졌다. 손을 흔들며 구경하던 수많은 군중은 그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는데, 교황이 바로 이 행렬 중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아니 근데 남자가 아이를 낳다니? 그것도 교황이? 바로 그가 9세기에 교황 레오 4세와 베네딕트 3세 사이에서 2년5개월 동안 재위했다는 전설적인 여교황 요한나이다. 이 요한나 여교황이 허구의 인물이었던가? 아니면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이었던가? 이 물음이 수세기 전부터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818년 시골 가난한 수도승의 딸로 태어난 요한나는 어릴 때부터 지혜와 총명이 넘쳤고 커서는 학자가 되겠다는 소망을 늘 품고 있었다 한다. 당시의 국제어인 라틴어, 그리스어는 물론 철학까지 깊이 있게 공부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지식탐구를 늘 갈구하던 그녀는 금서까지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고서는 여성이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총명함을 갖추었을지라도 남성에 비해 많은 차별성이 있다는 것을 일찍 알아 차렸다 한다.

그녀는 머리를 자르고 천으로 가슴을 묶어 평평하게 만든 후 남장을 한다. 이름조차도 여자 이름인 요한나(Johanna) 를 버리고 남자 이름인 요하네스(Johannes)를 사용하며 독일 풀다(프랑크푸르트-마인츠 근교)에 있던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남장이 들통날까봐 늘 조마조마하게 살았지만 다행히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그녀는 사제 서품까지 받았다. 그녀가 신비스런 약초처방을 가지고 많은 병자들을 고쳤기에, 함께 살았던 그(그녀)의 동료들은 이 의술에 늘 탄복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높은 열에 시달렸던 요한나가 이젠 옷을 벗고 검진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옷을 벗자니 여성임이 분명 들통 날 것이 뻔하고,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녀는 수도원에서 아예 도망을 쳤다.

그녀는 로마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여기서도 그녀는 신비한 의술로 병자를 고치다 보니 유명한 의사(Medicus)가 되었다. 마침 그때 통풍에 시달리던 교황 세르기우스 2세를 그녀가 고쳤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가 교황의 주치의로 일을 하게 되자 그녀의 신분은 더욱 더 상승가도를 달렸다. 물론 그녀가 여성이란 사실은 어느 누구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다. 교황 세르기우스 2세가 죽고 새 교황으로 레오가 선출 되었지만 그의 철천지 원수인 추기경 아나스타시우스에 의해 그가 독살당했다 하는데, 그때 요한나가 교황 레오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

교황이 된 요한나는 비밀스러운 사랑을 여러 남자들과 나누었다 한다. 그러다 덜컥 임신을 하게 되자 갖은 방법을 동원해 낙태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었고, 위에 언급했던 대로 엄숙한 교황 행렬을 하는 동안 갑작스런 통증 끝에 조산아를 낳고는 그녀도 함께 죽었다 한다.

교회는 사실 17세기 초까지 여자교황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었다. 어떤 기록에는 ‘요한나라는 여자가 교황 레오의 후계자로 2년5개월 그리고 4일 재위하였다’고 남아있다. 그러다 17세기 이래로 교회가 그녀에 관한 사록을 체계적으로 삭제해 나갔기에 레오 4세와 베네딕토 3세 사이에 있었던 여교황 요한나에 대한 흔적은 점점 사라지면서 교회에서도 공적으로 더 이상 표명하지 않았다.

이렇게 교회가 그녀에 대한 자료를 체계적으로 없애고 변조했기에, 그녀의 자취를 찾긴 힘이 들었지만 그나마 약간 남아 있었던 기록문서나 문헌을 바탕으로 수 세기를 내려오면서 끊임없이 그녀에 관해 표명되곤 했었다. 때로는 전설적인 인물로, 때로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로. 1278년에는 도미니카 수도승 마틴 폰 트로파우, 1479년에는 바르톨로메오 사키르크가 다시 이 여교황에 대해 역사적인 인물로 언급했었고, 그러다 1649년 네덜란드인 데이비드 블론델이 학문적인 연구를 시도했으나 증명이 안 되니 이 여교황을 전설적인 인물로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옛 문헌을 들추어 보면, 1737년 랑팡트가 라틴어로 쓴 문서에 역사적인 인물로 간주한다는 기록, 라이프치히에서는 1879년, 뮌헨에서는 1912년에 다시 언급되곤 했었다. 최근엔 에어랑겐-뉘른베르그 대학에서 중세사를 전공하는 헤르베르스 교수는 케르너 교수와 함께 ‘전설적인 요한나 여교황의 전기’를 공동 저술했다. 이 책은 여교황 요한나에 대한 얘기를 대중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더불어 학술적인 논의까지 곁들였고 또 다양한 증빙출처도 제시되어 있는 빈틈없는 연구서라 한다. 위에 언급했던대로 이 학자들의 주장은 “17세기까진 그녀의 기록이 사록으로 존재했으나 이후 바티칸이 그녀에 대한 기록을 지웠다”면서 요한나를 역사적인 인물로 표명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얘기가 역사소설로도 많이 출간되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돈나 크로소(베를린 1996), 엘리자베스 궤스만(베를린 1998), 페터 스탄포르드(베를린 2000), 엠마누엘 뢰데스(베를린 2000), 잉게보르크 크루제(베를린 2002) 등등이 있다. 또 영화도 두 편이나 나왔다. 하나는 2007년에 벌써 DVD로 나왔고, 최근의 새 영화는 2009년부터 유럽에서 상영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런 영화, 역사소설, 그리고 연구서 등의 출간은 사람들이 요한나 여교황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고향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엔 그녀에 관한 직접적인 자취가 별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마인츠의 마르티누스 학술도서관은 10월1일까지 87개의 자료를 가지고 이 여교황에 대한 전시회를 계속한다고 관장인 힌켈 박사가 특별히 전하는 기사도 눈에 띈다. 그녀의 고향 후손들은 1000년이 더 지난 지금 이런 전시회를 통해서 그녀를 기억 속에 다시 되살리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물음, 요한나가 허구의 인물이었던가? 아니면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이었던가?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만약 그녀가 단순히 전설적인 허구의 인물이었다면 어째서 그녀의 출생에서부터 성장 과정이 이토록 상세하고 정밀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서울=뉴시스】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88호(8월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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