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도 가톨릭의 부패상에 실망한 이들이 1520년과 1523년 사이에 종교 개혁운동을 일으킨다. 이들을 후게노텐(Hugenotten)이라 칭하는데, 구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기독교 종파다. 우리는 종파라 하면 무조건 부정적인 것을 떠올리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종파에는 긍정적, 부정적인 요소 두 갈래가 있다.
종교학에서 해석하는 구체적 이론은 접고, 요약하면 겐프에서 시작한 칼빈주의가 16세기 중반에 점점 더 세력을 확장하자 프랑스에서도 귀족을 포함한 많은 신교 추종자들이 생겼는데 이들을 일컬어 후게노텐이라 한다. 이 글에선 ‘후게노텐 신교’라 칭하자.
이렇게 생겨난 후게노텐 신교도들은 프랑스에서 구교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데 궁극에는 1562년에서 1598년 사이에 8번의 동족 전쟁으로 번진다. 이때 후게노텐은 영국과 독일의 지지를, 구교는 스페인의 지지를 받으며 이 8번의 전쟁 끝에 후게노텐이 공무원으로 등용이 될 정도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관용을 쟁취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얘기가 등장한다. 소위 1572년 8월2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바르톨로메오의 밤(Bartholomäus-Nacht)이다. 프랑스 파리에다가, 무슨 밤 이러니 낭만적인 것을 쉽게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 정반대인 삶과 죽음이 뒤엉킨 아수라장의 밤이다. 바르톨로메오(Bartholomäus)는 그날이 이 성인 축일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밤(Nacht)은 이 사건이 밤에 일어났기에 붙은 이름이다.
사학자들은 말하길 8번이 모자라 9번째의 종교 전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이 피의 밤을 은밀하게 꾸민 자는 후게노텐을 말살하기 위한 하인리히 2세의 과부이고 구교인 카타리나 여왕이었다 한다.
그 후 새로 등극한 프랑스 왕 하인리히 4세가 낭트칙령을 1598년 제정하여 후게노텐인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 그렇지만 하인리히가 죽자 루드비히 13세는 리셀리유 추기경과 함께 후게노텐을 없애기 위해 다시 종교전쟁을 일으킨다. 그 결과 후게노텐들은 다시 1628년부터 종교적인 자유는 아직 가질 수 있었지만 쟁취했던 정치적인 권리는 다시 잃는다.
다음 왕인 루드비히 14세가 정권을 잡자 이들은 그나마 가졌던 종교의 자유마저 잃게 된다. 구교 구인들이 후게노텐의 가정에 침범하여 강제로 개종하라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낭트칙령까지 1685년에는 무효화시키고 더욱 더 핍박을 가한다. 후게노텐 교회를 뭉게 버리고 집회까지 금지시키며 구교로 돌아오지 않으면 무조건 이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프랑스에 머무는 후게노텐들은 다시 구교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대항하는 두 가지 부류가 생긴다.
구교로 돌아간 이들도 대개는 겉으로 구교인 척 했을 뿐 사실은 그대로의 후게노텐들이었다. 비밀 예배를 열다가 적발되어 몇 백 명이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그 중 유명한 이가 마리 두란트(1711~1776)다. 그 당시 인구의 약 1.5%였던 후게노텐들이 프랑스 혁명 후에 드디어 정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 받는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난 후게노텐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 당시 20만 명이 넘는 후게노텐들이 영국,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심지어 영국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로까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났다. 이때 많은 수공업자, 상인들, 군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귀족들도 포함되었다. 이들 중에는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언급되는 인물은 독일 문학사를 장식하는 작가 테오도로 폰타네, 또 유명한 학자 훔볼트 등등이다.
또한 그들이 피난 때 가지고 온 금이나 고가물건이 시장에 나오자 이것도 하나의 흥밋거리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관심 분야로 등장했다. 그때 후게노텐들이 정착한 곳마다 프랑스의 정신과 높은 문화를 퍼뜨렸다고 한다. 결국 후게노텐을 받아들인 나라는 그 당시 누구나가 선망하던 프랑스 문화를 그저 수입할 수 있었다고 오늘날의 학자들은 평한다. 오늘날 우리가 미국을 잘 모르지만 오직 닮아야 할 나라로 은연중에 삼고 있듯이 말이다. 이렇게 단순히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난 이들이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유럽에 프랑스 문화이식을 하는데도 한몫 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1685년경에 4만5000명 정도의 후게노텐이 독일로 온다. 3000~4000명이 그룹을 지어 각 지방으로 분산되어 살게 되는데 1700년경엔 후게노텐 신교들이 베를린 시민의 3분의 1을 차지하기도 했다. 수세기를 흐르는 동안 지금은 10, 11 대의 많은 후게노텐 자손들이 독일에서도 살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후게노텐 마을과 교회를 중심으로 살면서 후게노텐 역사, 후게노텐 정신사, 후게노텐 신학을 연구하고 조상들이 심어준 정신을 대물림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독일 헤센주에도 많은 후게노텐 후예들이 살고 있는데, 조그마한 대학도시인 마르부르크에도 후게노텐 사무실이 있을 정도다. 한 후게노텐 여인이 이 사무실을 지키면서 후게노텐에 관한 역사와 정신을 관심 있는 자에게 설명도 해주고 책도 판매한다. 동양여자인 필자가 그 사무실을 방문했더니 그들의 정신사를 기쁨에 찬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놀랍다. 그 당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발로 걸어서 피란 왔던 자기 조상의 정신을 조그마한 사무실에 앉아서 전해주고 있는 그녀의 인생 말년 모습이 종교를 떠나 인간적으로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종교가 뭐길래? 정치가 뭐길래? 정치적인 권모술수가 끼어 피비린내를 내니 정치와 종교의 관계는 그때도 정말 바늘과 실이었나 보다. 그 당시 부패했던 가톨릭에 염증을 낸 이들이 경건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뿐인데. 후게노텐은 한 군주의 정책에 따라 숨을 자유롭게 쉬다가, 한 군주가 거부하면 숨을 못 쉰다. 신은 ‘신교’라는 이름으로도 ‘구교’라는 이름으로도 끄달리지 않았을 터인데. 구교방식으로 섬김을 받든, 신교방식으로 섬김을 받든 아무 상관이 없고 신의 고유성(Eigenschaft)은 늘 불변일 터인데 ‘왜 인간은 저렇게 서로들 잣대를 만들어 구교라고? 신교라고? 이름 붙이며 싸우는지. 피비린내 나는 파리의 ‘바르톨로메오의 밤’에도 신은 신·구교간의 전쟁을 보고 혀를 차면서 울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신은 소리를 낼 수 없었기에 우리에겐 오직 침묵으로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