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이 있었겠지요
사정이 있었겠지요
  • 박은자 / 동화작가
  • 승인 2011.01.2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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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자의 인물동화> 이재오 씨 편 14

 티끌 하나 없이 순진하고 맑은 여자와 신념이 확고한 남자가 결혼을 하는 날입니다.
결혼식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와 있네요. 곱게 단장을 한 신부가 참으로 아름답고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아요. 주례를 맡은 분도 오지 않고요.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깨진 결혼식이라고 중얼거리며 가는 사람들도 있고요. 아,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났어요. 이젠 양가 가족들만 남아 있군요. 가족들도 초초하고 불안한 얼굴이에요. 신랑의 아버지는 문 앞에 서서 목을 길게 뺀 채 아들을 기다리고 있고요. 그런데 딱 한 사람 상기된 표정 그대로, 굳건한 얼굴로 의연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있군요. 초초해 하지 않고 신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람, 바로 아름다운 신부입니다. 누군가 그만 가자고 말해도 신랑이 반드시 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신부 때문에 가족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신랑이 네 시간 만에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마음을 졸이며 왔는지 신랑은 예복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했군요. 가봉을 못한 양복은 소매가 짝짝이 이고요. 와이셔츠가 너무 작아 얼른 친구의 와이셔츠를 빌려 입었습니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에게 말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마음 너무 졸였지요?”
그런데 신부가 배시시 웃습니다.
“괜찮아요. 사정이 있었겠지요.”

“사정이 있었겠지요.” 라는 말을 하는 신부를 바라보는 신랑의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물론 신랑에게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시국강연, 그리고 밤새 이어진 철야 농성, 신랑은 결혼식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시간을 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랑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신부에 대한 믿음이 출렁거립니다.

늦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랑과 신부는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경주에는 신랑신부가 묶을 방이 없습니다. 수학여행 철이라 여관마다 만원이었습니다.
결혼식에 네 시간이나 지각한 신랑은 이번에는 신부를 밤새도록 끌고 여관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여관마다 방이 없다고 합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너무나 미안합니다. 하지만 신부는 신랑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배시시 웃고 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무궁화 여인숙’ 문간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은 손님들을 위한 방이 아닙니다. 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창고입니다. 이불과 수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하지만 신랑과 신부에게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종업원들이 사용하던 때 묻은 이불을 덮고 신혼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 이불은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이불입니다.

신랑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어리고 고운 신부를 안고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신랑은 신부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수배 중이오. 당분간 당신과 함께 할 수가 없다오.”
신랑의 말에 신부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신랑과 신부는 손을 꼭 잡은 채 첨성대도 가고, 석굴암에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눈에는 첨성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석굴암도 보이지 않습니다. 두 사람 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보입니다.

신혼여행 딱 하루를 보낸 후에 신부는 혼자서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신랑은 도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신랑의 도피생활은 20년이나 넘게 계속됩니다. 붙들려 감옥에 간 것도 다섯 번이나 됩니다. 감옥에서는 최고의 고문기술자가 하는 고문도 받았습니다.

그 고문을 받을 때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개로 태어났으면, 차라리 소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에 대한 굳건한 열망과 신념은 고문 속에서 더욱 더 커갔습니다. 더 강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어떤 고문도 정의와 사랑의 마음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요.

혼자서 서울로 간 신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부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가슴에서 활활 타고 있던 아내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정보기관이 찾아와서 남편을 설득해달라는 회유를 하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원을 시켜준다는 말도 했습니다. 국비로 외국에 유학을 시켜주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이 가는 길이 바른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길 또한 아내가 따라야 할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남편은 감옥 안에서, 아내는 밖에서 금강석처럼 단단해졌습니다. 어린 신부였지만 신랑과 똑같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두 사람, 반독재에 항거하고자 했던 신념이 확고했던 두 사람, 그런 사람들로 인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꽃을 피웁니다.

이제 신랑은 예순을 훌쩍 넘겼습니다. 곱기만 했던 신부의 얼굴에도 주름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러나 재오 씨에게 아내는 여전히 고운 신부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동지입니다. 예기치 못한 삶의 고난이 생길 때마다 아내는 여전히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사정이 있었겠지요.”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 그보다 더 큰 사랑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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