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이다. 고통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승리에 환호를 먼저 보내자. 교회는 여러 갈래로 내분되고 불법이 판을 쳐 우리마음을 아프게 하고 세상은 우리를 향해 핍박을 쏟아 내고 있는게 현실이지만, 우린 기뻐해야 한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이다. 그 길에 놓인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며 가는 힘든 삶이다. 좁은 길로 가야하는 이유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행진을 우린 멈추면 안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근심 뒤로 하고 기뻐해야 한다.
부활 사건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은 셋이었다. 물론 복음서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여인들이 등장했지만, 이처럼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에 목격자로 여인들이 등장한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성경에서 여인들은 대부분 주변인물로 비춰지곤 했다.
사실 부활의 첫 목격자로 여인들이 등장한 것은 그들이 복음의 중심부에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남자들이 고난 앞에 놓인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 갈 때 여인들은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스도가 피와 물을 다 쏟고 숨을 거두고 십자가에서 내려질 때 까지 함께 했다. 남자들과는 달리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었던 힘을 여인들은 갖고 있었다.
남자들은 무서워서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발라 드리기 위해 일찍이 무덤으로 향했다. 남자들은 주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그와의 관계도 끝났다고 여겼지만, 여인들은 주님이 돌아가셨음에도 그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 역사적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여인들은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워 그대로 실천한 강한 믿음과 마음이 여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어느 심리학자는 여성들은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반면 남자들은 이용가치를 따진다고 한다. 제자들은 어쩌면 예수가 죽음으로 더 이상 이용가치가 사라졌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랑을 경험하며 여전히 살아있다고 여겼다.
오늘날에도 남자들은 생명이나 인간 존재에는 관심이 없고, 권력과 남의 것을 쟁취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순전히 이권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이들이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 등 연약한 생명들임을 볼때 더욱 그렇다. 권력과 이권 다툼을 접고 생명을 사랑한다면 이처럼 혼돈스러운 전쟁과 살상도 멈추고 만다. 그리스도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런 예수님이 이 땅에 행하신 사랑은 여성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도 여성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생명을 잉태하고 죽을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 그 생명이 빛으로 나와 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게 된다. 이때 여자는 아이를 낳기 전 여자로서 누리는 여러 가지 욕심을 죽이고 새롭게 어머니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는 순환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판단하고 무덤에 묻어 버린 존재임에도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죽음의 권세를 깨지 못한다면 세상에 종노릇 할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린도전서 15:24-26)”고 말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생명을 극진히 사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현재의 말썽 많은 교회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