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이라는 용어, 타당한가
'조선족'이라는 용어, 타당한가
  • 김연갑 /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 승인 2012.06.2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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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아리랑사태에 대한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수장의 제1성은 “중국아리랑은 우리 아리랑의 아류이다”라는 19세기적 문화진화론의 자문화 우월주의적 발언이었다. 그야말로 비문화적인 발언이었다.

중국동포의 아리랑은 아류이니 중국 것이 되어도 된다는 말인지, 아류는 본류와 무관하니 떼어버려도 된다는 말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동포사회의 아리랑은 1930년대 영화 <아리랑>의 항일성에서 귀납된 ‘민족의 노래’화로 인한 집단기억의 동결현상(35년간의 식민지 체험은 대신 ‘민족’의식을 강화시켰다. 이 이유를 문화빙점 Cultural Freezing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즉 고국을 떠날 때 가지고 간 가치관과 성향 등을 변화 없이 지속하여 보수적 성향을 유지하려는 현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분단현실인 오늘에서도 이 ‘민족’은 남북 모두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양측에서 아리랑은 민족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존재하게 되었다)을 만들어 유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포들에게는 ‘아리랑으로 쓰고 어머니·고향·조국으로 읽게’ 한다. 이런 아리랑을 어떤 기준으로 본류 아류나 우등 열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중국 동포를 ‘조선족(朝鮮族 China's Korean ethnic group)’으로 부른다. 그런데 이 명칭은 문제가 있다. 즉,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제가 쓴 ‘조선’을 쓴다는 문제와 북한과 직결된 일족이라는 해석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조선왕조의 ‘조선’을 연용한다고 볼 수 있고, 이를 규정한 시기가 1955년 12월 18일로 중국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되면서 중국의 한 개 소수민족으로 사회정치적 지위를 얻게 된 것으로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글쓴이는 시대 구분 없이 굳이 ‘중국동포’ 또는 ‘중국 동포사회’로 쓰고자 한다. 우선 ‘동포’라는 어의가 조국과의 긴밀성을 느끼게 해주고(재단법인 <재외동포재단>의 명칭도 이런 이유로 사용된 듯하다) 중국 한족들이 동포들을 ‘아리랑족’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적어도 동포들이 아리랑에 대해서만은 포네믹(phonemic; 객관적인 문화읽기의 현지학자들이 쓰는 방법론으로 에믹 emic과 에틱etic이 있는데,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 동일하게 이해하는 범주를 포네믹 phonemic하다고 한다. 즉 아리랑이든, 장백산아리랑이든, 또는 <관현악곡아리랑>이든 이를 부르거나 들을 때는 같은 정서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말한다)하기 때문이다.

중국 동포사회는 다음의 세 가지 기층을 전제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주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의암 유인석(柳麟錫 1842~1915)장군과 같은 이들로, 강한 결기로 외세의 지배를 거부한 이들이다. 이들은 <처세강령 3조>(3조의 첫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라’, 둘째는 거지수구(去之守舊)-‘국외에 망명하여 국체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켜라’, 셋째 자정치명(自靖致命)-‘뜻을 이루지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이다) 같은 의지를 실천하기 위한 공간을 바로 중국 동포사회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조국이 해방이 되면 언제나 되돌아간다는 의식을 갖고 정착한 디아스포라이다. 영토 자체를 복속 당하여 가라해도 갈수 없는 중국 내 대부분의 소수민족과는 전혀 다른 존재 형태다.

둘은 일제강점기 반강제적으로 살길을 찾아 이주한 집단이다. 이들은 항일운동 기반이 되어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한 공동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식량과 약품 보급은 물론, 정보 전달도 동포사회가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셋은 역사공동체 시절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지니고, 전통과 전승의 주체가 조국임을 분명히 하고, 향유하고, 전승·변이시키는 이들이다. (몽골이나 키르기스족과 같이 모국문화의 지속과 변이의 전통문화 향유집단의 동질성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의식과 삶을 사는 이들이 부른 노래를 대표하는 것이 아리랑이다.

조선동포가 주로 사는 지역은 1세기 전 동아시아 격동의 진원지였다. 중국·러시아·일본·조선의 첨예한 국익이 충돌한 곳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커다란 변동을 야기했다. 결국 일본의 선점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항일독립 투쟁의 성지가 됐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고토(故土)이며 우리 조상의 발상지였으니 심회는 복잡해진다. 일제는 조선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만주에서 행세를 했고, 이로해서 중국인들에게는 조선인이 일본의 앞잡이로 비쳐져 미움과 격멸을 받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조선·만주국(1932~1945)을 아우르는 일본제국의 모순을 해소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일제가 대륙 침략의 전초 기지화 하여 조선의 대대적인 ‘만주행 엑소더스’를 있게 한 것이 오늘의 동포사회의 형성 배경이다. (일면 만주는 막연한 ‘기억의 땅’이거나 항일투쟁의 성지’라는 인식 속에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만주의 역사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이뤄지면서 ‘주변성’과 ‘혼성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사실 1940년대 초는 만주족·러시아·한족·조선인·일본인·몽골인들 외에 프랑스·독일·폴란드·우크라이나·타타르 등 50여개 민족 45개 언어가 혼재했다고 한다. 이는 이 만주가 그만큼 욕망이 중첩된 공간으로 ‘블랙 홀’로 작용했다. 조선일보, <가장 모던 한 곳은 만주?>, 2011, 7, 1.)

현재 조선동포사회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14번째 규모다. 국경을 접하고 있는 14개국 중 하나이다. (한반도와의 국경은 지정학적, 안보적 가치가 가장 크다고 한다. 아리랑 상황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해방이 되면서 70만 명이 해방 조국으로 돌아갔고, 150만 명이 중국 동북 지방에 정착했다. 이중 연변 지역만 82만 여명이 된다)

조선족의 음악문화는 한민족문화의 저류로 수십 년 동안 이주를 거처 중국 동북3성을 중심으로 정착, 주변 민족과 접촉하면서 변이 되었다. 즉, 한민족의 음악을 토대로 하고 민족 동질성을 보존하면서 자기의 음악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그 중심에 아리랑을 두고 있다. <후원 신나라레코드>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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