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흉기난동’과 ‘인면수심 성폭행’ 등 사회 전반에 각종 범죄가 들끓고 있다. 또한 각종 ‘지하철 X’ 등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 자살률, 이혼율, 남녀 소득격차, 산재 사망자수, 저임금 노동자 비율, 해고의 용이성, 사교육비 비중, 국채 증가율, 세부담 증가율, 근로시간 등 OECD 국가 중 1위인 것이 어찌나 많은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출산율은 자랑스럽게(?) 뒤에서 1위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무한성장으로 선진국이란 그럴싸한 명패는 달았으나, 의식수준은 개발도산국이다. 바닥을 치고 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 한 것이 ‘속빈 강정’이 되어가고 있다. 자신들의 욕구충족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법과 제도의 규범쯤은 우습게 여겨버리는 일이 흔한 세상이다. 다시 말해 사회전반에 ‘아노미 현상’이 팽배해진 느낌이다.
법이 정의의 편이 아니고, 가진 자와 기득권 세력이 판치는 사회. 많이 버는 사람이 탈세하고, 적게 버는 사람은 에누리 없이 세금을 내는 사회. 뻔한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떵떵거리는 사회.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사회.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그늘진 얼굴이다.
한 때 예의와 범절을 누구보다 중시했던 우리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언제부터인가 사회전반에 1등 풍조가 생겨났다. 1등이 아니면 패배한 인생, 실패한 삶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됐다. 남의 고통과 불행은 곧 나의 즐거움이 되어버린 비극적인 세상이다.
자라나는 새싹들은 윤리의식을 배우기보다 좋은 대학에 가기위한 성적 올리기에 혈안이 됐다. 소중한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들기보다 또래의 친구들을 밟고 올라서 1등이 되기 위해 우정 따위는 내팽개쳤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세상의 지경을 넓히기보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한 스펙 쌓기에 몰두했다. 배낭여행이나 봉사활동 등 대학생으로써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버렸다. 그 흔한 청춘을 실은 기차여행도 사치로 여겼다. 오직 연봉 많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만 시간을 할애했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골드클래스가 되기 위한 노력에 젊음을 바쳤다. 이 얼마나 빡빡한 인생인가. 하지만 오늘날 실패자,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한 기본 스펙일 뿐이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실패자로 낙인찍혀 사회의 냉대를 받고, 결국 외톨이가 되어 범죄자의 길로 접어들기에 발버둥 치는 것이다. 위태로운 외줄타기에서 발을 헛디딘 사람들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사회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사회를 향해 복수를 하겠다”는 위험한 생각으로 스스로 범죄자의 굴레를 뒤집어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이다.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사회가 국민 개개인의 인생을 망쳐놓은 꼴이다. 1등만 강요한 채 인간으로서 갖춰야할 기본 소양은 뒷전에 놓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와 적개심을 품은 잠재적 범죄자를 양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적으로 사회의 책임만 물으면 될까. 아니다. 한국교회는 누구보다 많이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기독교의 의무이자 사명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눴다.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역에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해왔다. 인정한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한국교회 안에서도 물질주의가 팽배해져 가기 시작했다. 교회의 크기와 교인의 수 등 겉으로 점수가 산출되는 것이 중요해졌고,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방관자 역할만 했다.
실제 각종 흉악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한국교회는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윤리의식 부재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 발언, 경제적 발언에만 관심을 뒀다. 심지어 모범을 보여야할 목회자마저 윤리의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례가 종종 일어나 안타까울 뿐이다.
사회가 바람 앞에 등불이라면, 한국교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자라나는 새싹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고, 사회적 부정과 비리에 맞서 싸우는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 더 이상 이 나라에 잠재적 흉악범이 들끓지 않도록 교회가 앞장서 정화활동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