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린궁핍화의 망령
근린궁핍화의 망령
  • 정문재 부국장 겸 지식정보부장
  • 승인 2013.01.29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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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 정책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정책이 확산되는 조짐이다. 하지만 네가 죽으면 나도 살기 힘들다. 경제도 생태계다. 상대방이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다. 근린궁핍화 정책은 '루즈-루즈(lose-lose) 게임' 이다.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공멸을 초래할 뿐이다.

대표적인 게 외환시장 정책이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만 해도 노골적인 환율 전쟁은 아니었다. 그저 자금시장 경색을 막기 위해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통화가치 하락을 가져왔다. 미국, 유럽 등 주요 선진국들이 동시에 양적 완화에 매달렸기 때문에 경쟁적인 평가절하로 비춰졌다. 그래서 귀도 만테가(Guido Mantega) 브라질 재무장관이 "세계적인 환율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해도 공명(共鳴)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양상이 달라졌다. 일본은 정권 교체와 함께 전면적인 환율 전쟁을 시작했다. 개전(開戰) 명분은 '경제 회생'이다. 일본 자민당은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후 공세적인 경제정책을 실천하고 있다. 자민당은 '부흥'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후 '경제 재생'을 비롯해 '교육 재생', '외교 재생', '생활 재생' 등 4대 재생을 다짐하고 있다. 아베 신조 내각은 출범과 함께 경제 재생을 목표로 일본 중앙은행을 압박, 대담한 금융완화를 추진중이다.

외환시장은 아베 내각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12월14일 일본 중의원 선거 직전만 해도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83.62엔에 머물렀다. 하지만 자민당이 승리를 거두자 불과 한 달여만에 90엔을 넘어섰다. 한 달 사이에 무려 8% 가까이 엔화 가치가 떨어진 셈이다. 일부에서는 올 4월에는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97엔 선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역사는 환율전쟁이 항상 파국으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1930년대 대공황 때도 그랬다. 영국은 파운드화 고(高)평가에 따른 성장둔화, 실업률 증가 등으로 몸살을 앓다가 1931년 9월 금(金)본위제를 포기하고 말았다. 영국은 금본위제 포기와 함께 적극적인 파운드화 평가 절하를 추진했다. 수출 경쟁력이 살아나 성장세를 되찾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교역 상대국들이 경쟁적으로 평가절하를 추진함에 따라 '자살골'이 되고 말았다.

환율이 출렁거리면 무역은 위축될 수 밖에 없다. 기업은 물건을 팔아도 환차손으로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수출을 꺼리게 된다. 이는 결국 전세계적인 무역 감소, 나아가 경기 침체로 이어진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관세전쟁까지 벌어졌다. 미국이 스뭇 할리 관세법(Smoot-Harley Tariff)을 통해 2만여개의 수입품에 대해 무려 59.1%의 관세를 부과하자 다른 나라들도 일제히 보복 관세 조치를 취했다. 미국의 경우 1933년 수입이 1929년에 비해 66%, 수출은 같은 기간 동안 61%나 줄어들었다.

지금도 양상은 비슷하다. 다만 대공황 때처럼 전면적인 관세전쟁은 벌어질 수 없다. 세계무역기구(WTO)체제가 가동되고 있는 데다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관세장벽은 무의미해졌다.

그 대신 기술 규제 등 비관세 장벽이 활용된다. 기술장벽(Technical Barriers)이 대표적인 예다. 국제표준과 맞지 않는 표준을 적용하거나 비슷한 인증은 아예 인정하지 않는 식이다. 이런 기술장벽은 최근 들어 급증하는 추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기를 낙관하는 목소리도 듣기 어렵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이달 14일 "우리는 아직 숲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너나 할 것 없이 근린궁핍화 정책에 매달리면 세계 경기 회복은 더욱 늦어질 수 밖에 없다. 뉴욕증시의 다우지수는 대공황직전인 1929년3월 381포인트에 달했지만 1932년7월에는 41포인트까지 떨어졌다. 다우지수는 1954년11월에야 382포인트로 무려 25년만에 380선을 회복했다. 소모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의 결과다.

리처드 쿠퍼 전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통화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정부의 경제정책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충격 요법은 임시 처방일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아베 일본 총리를 비롯한 각국의 지도자들은 역사를 되새겨봐야 한다. 특히 경제사를 꼼꼼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합리적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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