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공화국과 이방인들
프랑스공화국과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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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7.1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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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프랑스공화국과 이방인들 박단 저 | 서강대학교출판부 | 값 : 25,000원
2005년에 출간된 ‘프랑스 문화전쟁:공화국의 이슬람’처럼 이번에도 결론에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비판을 받을 것 같다. 이는 이 책의 태생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에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렇지만 연구 주제가 현재의 문제인 이상 무엇인가 대답 혹은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학자이면서 해제의 문제에 뛰어든 이상 이러한 압력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본격적인 서평을 통해서 혹은 과제물로 제출된 학생들의 서평에서조차 이러한 이야기는 자주 듣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이 책의 에필로그를 쓰고자 한다.

이 책의 논점은 간단하다. 필자가 그동안 강조했던 것은 프랑스 주류사회와 무슬림이민자 혹은 그 2세대 사이의 ‘문화전쟁’이 사회통합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번 저술에서는 그보다 무슬림 이민자들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상황 때문에 프랑스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수 없었고, 또 진정 공화국시민으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들이 세속화되지 못했다는 비판은 종교 문화적 측면이라기보다 오히려 사회경제적 측면과 더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 ‘타지화’되고 있는 것이 이들만의 탓일까?
두 번째로는 유대인의 경우이다. 최근의 현상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유대인의 사회통합 여부는 유대인 본인들보다 프랑스 주류사회의 처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프랑스가 홀로코스트에 협조한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거기서부터 오는 프랑스 정계 및 언론의 유대인에 대한 ‘긍정적 차별’이 이들의 진정한 사회통합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례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후 ‘반인도적범죄재판’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이 재판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사건만 공소시효 없이 기소될 수 있었기에 유대인을 제외한 다른 집단의 요구는 수용되기 어려웠다. 프랑스의 반인도적 범죄재판이 일종의 ‘유대중심주의’로 흘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최근 또 발생하였다. 즉 프랑스 상원이 이미 2011년 말에 하원이 통과시킨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부정할 때 처벌”하겠다는 법안을 2012년 초에 통과시킨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터키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한 것과는 별개로, 이는 프랑스 사회에 또 하나의 ‘유대인 중심주의’를 만들어놓은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또 하나의 소수 공동체를 인정하는 행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부인할 경우 처벌할 수 있게 한 1900년의 게소법(loiGayssot)이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부인하는 경우 처벌할 수 있게 한 부아이에법(loi Valerie Boyer)은 법의 보호대상이 되는 특정 소수인종, 종교, 문화집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 앞에 평등한 개인 이외의 모든 중간집단을 인정하지 않는 공화주의 원칙과는 모순된다. 즉. 프랑스 정부는 이를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공화국 원칙에 의해 그동안 배제되어온 공동체주의를 국가가 스스로 인정하는 형태를 보임으로써 극단적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터키 공동체가 다른 형식으로 조만간 프랑스공화국 내에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무슬림이민자들의 경우와 유대인(혹은 아르메니아인)의 경우가 비록 별개의 사안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 두 경우를 비판적으로 고려한다면 지금까지 프랑스 내 이방인들이 프랑스 사회에 진정으로 통합되지 못하는 이유를 이들만의 탓으로 보는 시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충분히 입증했다시피, 무슬림이민자들이 거주, 고용문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으로 해서, 사회적 편견을 받고 인종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 또 이로 인하여 공화국 시민이 되기 어려운 것이 이들 탓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또한, 중동전쟁 이후 아랍계 이민자에 대해 프랑스가 취하고 있는 입장은 어떠한가? 9.11 사건 및 유럽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러행위, 이라크전쟁, 아프간전쟁 이후 무슬림을 보는 유럽인들의 시각이 이들을 더욱 타자화 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프랑스 이방인들이 공화국시민으로 거듭나기 어려운 점을 이들 이방인의 탓만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유대인의 경우도 앞서 설명한 대로, 주류사회의 유대인에 대한 ‘긍정적 차별’이 공화국 단일성을 훼손하고 있다면, 이는 유대인보다도 프랑스 주류사회의 책임이라고 할 것이다. 1997년에 프랑스 정부의 공식기관인 통합고위위원회가 제시한, ‘프랑스보편주의는 소수의 권리나 공동체주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경해를 다시 상기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물론 프랑스공화주의의 보편주의가 타당한가의 문제는 별개의 논의 대상으로 추후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그동안 일반적으로 유럽계 이민자들은 프랑스 사회에 비교적 잘 동화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신화’는 이들 유럽계 이방인의 프랑스 사화로의 동화과정을 너무 순탄한 과정으로 믿게 만든 것은 아닌지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양차 대전과 1930년대 경제공황을 겪으며 수많은 유럽계 이민자들이 프랑스를 떠났다는 사실을 대체로 간과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폴란드 노동자의 예를 들더라도, 우리는 그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지를 잘 알면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 체류 동안 이들 이민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보다 몇 배의 고통을 겪었으며, 흔히 실업에 처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아탈리아, 벨기에 등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민자들 또한, 전쟁 후 그들 국가의 여건이 나아지자마자 귀국 행렬에 동참하였으며, 더 나은 조건을 따라 타국으로 떠났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이래 프랑스로 온 유럽계 이주민 상당수는 현재 프랑스에 남아 있지 않다.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제3공화국의 외국 이민자 정책에 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이미 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공화국과 이방인들’을 고찰할 때, 남은 자뿐 아니라 떠난 자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떠난 자들은 출신자로의 귀향을 통해 프랑스공화국 시민으로 동화되기 어려웠음을 또 다른 방식으로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프랑스로 온 수많은 아방인들 중 일부만이 ‘공화국시민’, 그것도 불완전한 공화국시민으로 살아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잔류한 사람들은 프랑스 사회로 완전히 동화되기 위하여 자신들의 출신 국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사적으로 자신들의 모국어를 사용하고, 모국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한 사회로의 완전한 동화는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유럽계 이민자들이 ‘프랑스 용광로’에 녹아들었다고 평가받고 있고 무슬림들과 달리 사회적 차별을 거의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가시적인 현상은 이들이 프랑스 사회에 정착한 지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는 점과 프랑스와 같은 종교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들 출신국과 프랑스가 커다란 정치적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인 것은 이들의 외모와 이름이다. 이들은 ‘클래스’의 학생들이 교사에게 예문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던 “아이사타, 파투, 하시드, 무하메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에 그나마 고용이나 거주 등에서 주류 프랑스인으로부터 가시적인 차별을 받고 있지 않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오늘 아침 우연히 두 개의 기사를 읽었다. 하나는 프랑스 일간지의“나는 100% 프랑스인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내게 여전히 이민자일 뿐이다.”하는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 한 일간지의 충남 공주시의 ‘다문화가정’사진과 그에 대한 대학생 사진기자의 설명이다. 프랑스 신문은 샤르코지의 장관들이 이민자에 대해 행한 차별성 벌언에 대해 이민자 출신의 ‘공화국시민’으로서 느끼는 분노를 다루고 있다. 기사를 보며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 것이, 이들은 자신들이 공화국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공화국 시민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프랑스 주류사회의 시각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기사의 제목대로, 이민자 혹은 그들 후손들은 자신들이 100% 프랑스인 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류사회의 눈에는 이들이 여전히 이방이었다.

이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일천한 한국, 이 나라의 한 일간지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충청남도 공주시에는 680여 가구의 다문화 가정이 있다. 어려서부터 이들을 보며 자라왔고 봉사활동을 계기로 더욱 가까워졌다. 이들 대다수가 한국 사회에서 차별을 받으며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간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친숙히 만나볼 수 있는 이들을 이젠 이방인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 대학생 기자는 나름 수년간의 관찰 끝에 한국 내의 이방인들이 차별을 받고 있고, 이들이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누구나 이 글에 공감할 것이다.

두 경우를 바라볼 때, 이방인을 바라보는 시각차에 있어서 이민의 역사가 길고 짧은 것이 큰 문제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한국에 들어와 거주하고 있는 대다수의 이방인은 동남아시아 출신이며, 이들은 프랑스에 있어서 유럽계 이민자와 마찬가지 위상일 것이다.

한국의 ‘이방인들’이 우리와 더불어 사는데, 그리고 그들이 진정 이 땅의 ‘주인’이 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주장한 대로, 이는 그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열린 마음자세와 그를 위한 꾸준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다시 구체적인 대안 없이 글을 맺고 있지만, 필자가 ‘프랑스공화국과 이방인들’이라는 주제를 연구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가 국내 ‘이방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노력의 일환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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