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키는 군부가 쥐고 있다
태국, 키는 군부가 쥐고 있다
  •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 승인 2014.01.0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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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말부터 시작된 태국의 정치 위기는 잉락 친나왓 총리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한 고비를 넘기는 듯 했다. 하지만 쑤텝 터억쑤반이 이끌고 있는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가 이달 13일부터 최장 20일 동안 방콕을 폐쇄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섬에 따라 또다시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최장 20일의 의미는 2월2일 총선 보이코트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

현재 국민민주개혁위원회의 주장은 잉락과 과도정부가 사퇴하고 국민회의 구성 및 임명 총리를 통해 선개혁 후 총선을 치르자는 것이고, 이에 반해 잉락 과도정부는 선총선 후 개혁회의체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양측의 한 치 양보 없는 팽팽한 대립 속에 국민민주개혁위원회는 지난해 말부터 금년 초까지 진행된 총선 후보 등록을 무산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남부 지역 8개 주 29개 선거구에서는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관련법에 따르면 하원 정원의 95% 이상(500명 중 475명)이 선출되지 않으면 의회를 개원할 수 없기 때문에 설사 선거가 치러지더라도 의회를 구성하거나 정부를 구성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프어타이당이 주도하는 정부 여당은 선거등록일을 연장하도록 선거관리위원회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연장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선관위의 부당성을 최고행정재판소에 제소한 상태이다.

얼마 전 국민민주개혁위원회는 잉락 과도정부를 퇴진시키고 총선을 무산시키기 위해 이달 13일부터 방콕을 폐쇄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맞서 친정부 레드셔츠도 시위를 준비 중에 있다. 또 잉락 총리는 최악의 경우 비상사태를 선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군에게 이에 동의해 시위를 진압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군은 아직까지 거부 입장을 보이고 있다. 2개월여 지속되고 있는 이번 사태에서 군이 보였던 표면적인 중립적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군은 중립적인가? 쁘라윳 찬오차 육군사령관은 며칠 전 군 수뇌부 월례회의를 마친 뒤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쿠데타 가능성의 문은 열려 있지도 닫혀 있지도 않다. 상황에 달렸다"고 밝혔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곧 바로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하지만 줄곧 쿠데타 가능성 부인 끝에 나온 이번 돌발 발언은 군의 속마음일 수 있다. 2006년 쿠데타 이전에도 군은 쿠데타는 없을 것이라고 수차 언급한 적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군이 중립적인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없는 정황들은 여러 가지 사례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번 사태 과정에서 양 세력이 팽팽하게 기 싸움을 전개하던 중 반정부, 친정부 시위대 간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자 군은 양측의 중재역을 자임해 잉락 총리와 쑤텝의 모임을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쑤텝은 난국 타개 방법으로 새롭게 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중립적 인사를 총리로 임명해 “탁신 체제”를 제거하고 정치 개혁을 추진하자는 주장을 했다. 이는 사실상 쑤텝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었던 자리를 군이 마련한 셈이었다. 또한 이 자리에서 군은 어느 편도 아닌 국가와 국민 편에 설 것임을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정부편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잉락 총리의 요청에 의해서 마지 못해 시위 진압에 나서기도 했던 군은 기껏 해야 몇 명의 위생병을 파견해 경찰의 최루탄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돌보는 역할에 그쳤다. 그 즈음 전직 육군 고위 장성이 국민민주개혁위원회의 시위를 뒤에서 돕고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국민민주개혁위원회라는 명칭도 2006년 쿠데타 후 군이 만들었던 위원회와 그 이름이 유사하며 이후 전개되는 상황 역시 쿠데타가 발생한 후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는 지적이 많다. 쑤텝이 이른바 국민혁명, 국민 쿠데타라고 부르고 있는 현 사태 발생 원인 설명도 2006년 쿠데타 당시와 다를 바 없다. 예비역 장성들은 군은 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군의 결단을 재촉한 것이다.

이후 잉락 총리가 서둘러 의회 해산을 발표했을 때도 군의 동의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총선 실시일이 발표된 후 국민민주개혁위원회가 총선 보이코트 입장을 밝혔을 때 총선 찬반에 대해 군은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총선을 반대하는 국민민주개혁위원회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군부는 쑤텝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잉락이 집권하기 전 민주당 정권 하에서 쑤텝은 안보 담당 부총리직을 맡으면서 현재 육군사령관인 쁘라윳은 물론이고 그의 후견인이라고 볼 수 있는 2006년 쿠데타 주역인 아누퐁 파오찐다 전 육군사령관이나 전 국방부장관 쁘라윗 웡쑤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2008년 탁신 계열의 팔랑쁘라차촌당이 해산되고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며 쁘라윳 사령관이 존경한다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쁘라윗은 현재 쑤텝이 주장하는 임명 총리 물망에 오른 적도 있다. 군에서는 부인했지만 얼마 전에는 이들과 쑤텝의 회동설이 떠돌기도 했다. 지금도 국민민주개혁위원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쑤텝의 경호원 중에는 현역 군인들도 있다고 하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분명히 국민민주개혁위원회측에 심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군부가 과감하게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학습 효과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 세력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그 후 치러진 2007년과 2011년 선거에서 탁신 계열 정당인 팔랑쁘라차촌당과 프어타이당이 의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해서 두 차례씩이나 재집권했다. 고도로 정치화된 집단인 군이 이런 현실을 간과할 리 없다. 2010년 5월 친탁신 레드셔츠의 대규모 시위 때 진압 과정에서 1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발생하게 해 지금까지 그 책임 소재를 두고 시달리고 있는 군의 입장도 내놓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없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태국의 극심한 정치 불안은 지역 갈등과 계급 갈등으로 번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만간 내전 상태로까지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알려진대로 지역적으로 방콕과 남부 지역은 반정부측에, 동북부와 북부는 친정부 측에 서 있다. 민주당의 아성인 남부 지역에서는 이미 총선 보이코트를 한 상태이다.

얼마 전 잉락 총리는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친정부 레드셔츠는 방콕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네트워크가 남부 지역 주민들과 합세해 잉락 정부를 붕괴시키려는 시도에 대해서 강력히 경고하고 나섰다. 쿠데타가 발생하면 전국에서 반쿠데타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쁘라윳 육군사령관 자신도 지금과 같은 정치적 갈등이 지속되면 내전 발발의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군이 어느 한쪽 편을 들어 쿠데타를 일으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태국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속설도 여전히 유효하다.

7일 새벽에는 느닷없이 11일 어린이날과 18일 국군의 날을 맞아 군사 퍼레이드를 실시하기 위해 방콕 인근 지역에서 탱크를 포함한 각종 군사 중장비를 방콕으로 이동한 사건이 발생했다. 군은 부인하고 있지만 이를 쿠데타와 관련시키는 시각도 엄존하고 있다.

13일부터 국민민주개혁위원회가 수도 방콕을 점령하고 레드셔츠측에서도 이에 맞대응하여 심각한 유혈 사태가 발생해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됐을 때 군은 그 입장을 뚜렷이 해야 할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잉락 총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이 이에 동의해 친정부 측에 서서 시위 진압에 나서게 될지, 시위 진압 목적으로 나선 군이 내친 김에 쿠데타를 일으킬지를 아직 속단할 수 없지만 어떤 경우든 군이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쿠데타가 발생하더라도 그 방식은 과거와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군이 중재역을 자임했을 때부터 이미 조용한 쿠데타(silent coup)는 진행 중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가운데 13일 예견되는 혼란을 우려해 잉락 총리는 자신과 쑤텝 사이의 면담을 군이 주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고 보면 현 상황은 정부측이든 반정부 세력이든간에 군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군은 선개혁 후 총선 주장이나 잉락 과도정부 퇴진 등의 주장을 일부 수용토록 함으로써 쑤텝과 국민개혁위원회의 퇴로를 만들어주려 할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경우든 정치권에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군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을 때 또 다시 태국 정치의 자생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방콕=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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