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마포구 상암 MBC에서 열린 특별기획 드라마 '화정'(극본 김이영) 제작발표회에서 김상호 PD는 이렇게 말했다. '화정'이 정명공주의 삶을 실제와는 다르게 그려 역사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정명공주는 조선시대 선조의 딸이다. 배다른 오빠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동생 영창대군이 처형되고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감금되는 등 위험에 처하지만, 인조반정 후 공주의 자리를 되찾고 숙종 때까지 호사를 누리며 장수한 인물이다.
드라마 '화정'은 이렇게 조용하게 살다 간 정명공주를 권력다툼의 핵으로 둔갑시켰다. 극 속 정명공주는 광해군을 피해 일본에 가 남장을 하고 유황광산에서 일한다. 드라마는 조선 통신사 일행을 만나 조선으로 돌아온 정명공주가 신분을 감춘 채 광해군이 만든 화기도감에 입성하면서 생기는 암투, 음모와 권력을 탐하는 인간 군상을 다룬다.
'화정'은 실존 인물의 이름만 따왔을 뿐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었다. 사실(史實)과는 관계가 없으니 '팩션' 사극이라기 보다 '판타지' 시대극에 가깝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팩션'이 사극에 붙어 아무렇게나 쓰이고 있다. 팩션 사극은 특정 시대에서 인물이나 사건을 가져왔을 뿐 이야기는 작가 마음대로 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방송된 드라마 '기황후'로 재미를 본 MBC가 이 추세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김상호 PD는 "MBC 월화 사극의 위치는 판타지적인 픽션 사극과 역사적 사실만을 바탕으로 한 사극의 사이"라고 밝혔다.
'기황후' 역시 사실이 아닌 사건과 충혜왕, 기황후에 대한 왜곡된 묘사로 역사왜곡 논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흡인력 있는 이야기 전개와 흥미로운 멜로 라인으로 평균 21.9%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논란은 흐지부지됐다.
MBC 팩션 드라마는 결국 재미만 추구할 뿐 역사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역사왜곡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청률만 올리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역사적 실체 여부를 떠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으니 시청자는 극에 빠져들고, 재미가 돋보이니 논란은 잦아든다. 시청률을 위해 역사를 가지고 노는 모양새다.
'화정'도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잘만 전개된다면 중박 이상은 칠 드라마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조사에서 올해 2분기 가장 기대되는 드라마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조선시대 권력투쟁이라는 소재도 흥미롭다. 차승원과 이성민, 조성하, 박영규 등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도 곳곳에 포진했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은 '픽션' 사극이었고, 가상의 왕 '이훤'을 내세워 성공했다. 그럼에도 티끌만큼이나마 '팩트'를 고수하는 것은 정통 사극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MBC의 마지막 자존심일 수도 있겠다.
"역사 왜곡이라는 말이 안 나오도록 최선을 다해 드라마를 만들겠다."
김상호 PD의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최선을 다하면 역사 왜곡은 크게 논쟁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대한민국 3대 공중파 MBC가 언제부터 '재미만 있으면 뭐든지 OK'라는 식의 '시청률 지상주의 노예'로 전락했는지 참 안타깝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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