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의 한' 토해낸 미니멀리즘…'적벽가'
'민초의 한' 토해낸 미니멀리즘…'적벽가'
  • 이재훈 기자
  • 승인 2015.09.16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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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창극단 창극 '적벽가'
 15일 개막한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의 신작 창극 '적벽가'의 '미니멀리즘'은 러닝타임 내내 눈을 시리게 했다.

무대가 그 정점이다. 살만 남은, 낡고 거대한 부채가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였다. 접히고 펼쳐지고 턴테이블 무대 위에서 회전하는 부채는 종종 '적벽대전'의 뒤집어진 배를 연상케 한다.

이 메인 무대 뒷편은 병풍이 놓였다. 수묵화를 모티브로, 여백을 살린 영상은 삼고초려 전 제갈공명이 머물던 와룡강 인근 초막, 장판교 그리고 적벽이 된다. 악사들의 연주 공간인 오케스트라 피트는 적벽대전에서 수장된 난파선의 무덤이다.

조명은 한 줄기 빛이 돼 인물들을 따라다니는데 심해 속 어딘가를 연상케 하는 푸른 조명이 눈에 밟힌다.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고음이 많고 풍부한 성량이 필요해 가장 난도가 높은 판소리 '적벽가'가 바탕으로 이야기에도 무게감을 덜었다.

국립창극단의 50년 남짓한 역사 동안 '적벽가'를 창극으로 만든 것은 1985·2003·2009년 세 번뿐인데, 이번 버전은 특히 영웅보다 백성·군사·여인들에 초점을 맞춘다. 영웅들의 고뇌와 짐보다 백성의 한이 먼저 다가온다.

기존의 '적벽가' 사설(辭說·늘어놓는 말) 배열을 살짝 바꾼 이유다. 원 사설에서는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도주하는 대목이 적벽대전 이후에 나온다. 그러나 '적벽가'에서는 조조의 도주 대목을 적벽대전 전날 그가 꾸는 꿈으로 설정해 앞에 둔다.

적벽대전이 극의 마무리가 된다. 내내 적벽대전의 뜨거움과 민중의 한을 삼킨듯, 차가운 미니멀리즘을 뽐내던 무대 미학은 적벽대전에서 뜨겁게 펄펄 끓는다. 핏빛 전투는 아수라장이다. 화염 뒤 마지막에 남은 것들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엄청난 양의 재는 덧없는 인생과 같다.

이소영 전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은 이처럼 첫 창극에서 자신의 장기인 모던함을 덧입혀 막판에 주제 의식을 토해내는 묘를 발휘한다. 2011년 어린이 오페라 '지그프리트의 검' 이후 4년 만의 복귀작은 그녀의 장기와 새 도전을 적절히 버무린 작품이 됐다.

1993년 이병훈이 연출한 창극 '구운몽'에 조연출로서 국립창극단과 인연을 맺었던 그는 '적벽가'를 통해 창극과 열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

이소영 연출은 특히 단점으로 여겨진 국립극장 내 해오름극장 무대를 가장 잘 활용한 연출가 중 한 명으로 꼽힐 듯하다. 가부키 무대를 주로 올리는 일본 극장 양식을 쓰고 있는 해오름극장 무대는 시대에 맞지 않고 창극, 무용 등의 장르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세로 폭 대비 가로 폭이 넓어 가부키가 아닌 다른 공연을 올리는데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이소영 연출은 하지만 수평선을 연상케 하는 무대와 병풍 같은 스크린의 조합으로 '파노라마 창극'이라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무대 활용의 폭을 넓힌다. 제갈공명이 조자룡과 함께 무사히 주유의 진중을 빠져나오는 장면과 원근감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턴테이블 무대 등도 특기할 만하다.

이 모든 미학은 민초, 즉 이름 없이 죽어가고 스러져간 망자(亡者)를 위한 진혼곡이다. 유비·관우·장비·조조·손권, 영웅 틈바구니에서 이들을 위해 울려퍼지는 진혼곡이다.

화공으로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갈공명의 동남풍이 예측이든, 과학이든, 주술이든 무슨 소용이랴. 전장에 끌려 나온 백성들에게는 그저 모든 걸 태워버리는 불일 뿐.

'적벽가'의 모더니즘은 중국의 삼국지 시대나 한국의 현재나 위정자에 끌려다니는 민초들의 고통은 다를 바 없음을 노래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이자 '적벽가'의 도창과 작창을 맡은 송순섭 명창의 소리가 관객을 애끓게 한다.

'장화홍련'(2012), '메디아'(2013),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14)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2014), 정의신의 '코카서스의 백묵원'(2014)에 이어지는 국립창극단의 실험은 올해도 돋보인다.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2015~2016 레퍼토리 시즌'의 개막작이다. 19일까지 음악감독 김주현, 안무 박호빈, 무대디자인 김현정, 조명디자인 이우형, 영상디자인 추봉길. 국립창극단 단원 및 객원 출연. 2만~7만원. 러닝타임 150분(중간휴식 20분 포함). 국립극장. 02-2280-411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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