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영국, 두 개의 한국
두 개의 영국, 두 개의 한국
  • 정문재 부국장 겸 미래전략부장
  • 승인 2016.06.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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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保守)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보수는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필요하면 기꺼이 변화를 수용한다. 때로는 과감한 개혁을 주도하기도 한다. 변화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짝퉁' 보수일 뿐이다.

보수는 단지 섣부른 변혁을 경계한다. '유기체적 사회관'을 믿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기존 사회 제도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된 만큼 가볍게 다루면 위험하다고 여긴다.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보수의 아이콘이다. 보수주의자들의 훌륭한 벤치마킹 대상이다. 디즈레일리는 19세기 후반 글래드스턴과 함께 총리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영국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헌신했다.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구성원간의 조화는 필수다. 보수주의자들은 조화를 깨트리는 것은 단호히 배격한다. 디즈레일리도 그랬다. 그는 사회적 조화를 위해 과감하게 변화와 개혁을 추진했다.

보수 진영 내에서 큰 반발과 비판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원칙은 개나 줘버려라! 당(黨)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Damn your principles! Stick to your party.
)"라고 일갈했다. 영국과 보수당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디즈레일리는 정치인이자 문인이었다. 여러 편의 소설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영국의 문제를 비판했다. 특히 양극화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시빌 또는 두 개의 나라(Sybil, or The Two Nations)'다.

소설의 주인공 월터 제라드(Walter Gerard)는 이렇게 말한다. "두 개의 나라가 있다. 서로 접촉하거나 동정을 표시하는 일도 없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모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행성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법(法)의 적용을 받는다. 하나는 부자들의 나라, 또 다른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나라다.”

디즈레일리는 양극화를 해소하지 못하는 지도층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산업혁명에 힘입어 생산 및 교역은 늘어났지만 번영의 열매는 상류층이 독점했다. 노동자들은 뼈 빠지게 일해도 임금이 낮아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지 못했다. 도시 환경도 정비되지 않아 콜레라 같은 전염병으로 숱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디즈레일리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주력했다. 총리로 취임한 후 숱한 개혁 입법을 쏟아냈다. 그는 1875년 '노동자 주거환경 개선법'을 통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저리(低利) 자금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을 짓도록 지원했다.

공장법(Factory Act)을 개정, 노동자의 평화적 시위를 허용했다. 또 노사법(勞使法)을 통해 공장주가 계약을 어기면 노동자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밖에 공공건강법, 식품의약품 판매법, 교육법 등을 통해 삶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

자유당 인사들조차 디즈레일리의 적극적 개혁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광산 노동자 출신의 알렉산더 맥도날드(Alexander Macdonald) 하원의원은 "노동자들을 위해 자유당이 지난 50년간 일한 것보다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권이 최근 5년간 이뤄낸 업적이 훨씬 더 많다"고 평가했다.

19세기 영국처럼 21세기 한국에서도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지도층은 '침소봉대(針小棒大)'라며 마뜩잖은 표정을 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다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고, 다른 법(法)의 적용을 받는다고 여긴다.

'흙수저'라는 말은 이런 인식을 상징한다. 한 나라에서는 '유리 천장'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처지가 영속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래서 절망하고, 분노와 증오를 키운다.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이 결코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일부 특권층이 권력, 명예, 부(富) 같은 사회적 재화를 독점한다. 검찰이나 법원 고위직으로 퇴직한 후 불과 몇 년 만에 수백억 원을 벌어들인다. 죄의식도 없다. 이런 사후적 뇌물은 '전관 예우'로 합리화한다.

보통사람의 불법 행위는 특권층에서는 합법으로 둔갑한다. 이런 사회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갈등은 균열로, 균열은 붕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두 개의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려면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기득권층의 자기 혁신이 절실하다. 디즈레일리를 가진 19세기 영국이 부럽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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