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무용지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는 아주 잘한 일”이라면서 유럽인들의 불안과 분노를 유발시키고 있다. 또한 트럼프는 세계무역기구(WTO)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의 탈퇴를 불사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축으로 작용을 해온 브레튼우즈 체제를 부정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6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도자들이 전후 70여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의 해체를 원하는 미국대통령과 씨름을 해야 하는 힘겨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그동안 설마 하는 심정으로 트럼프의 태도를 관망해오던 유럽지도자들이 15일 트럼프의 영국 더타임스 인터뷰와 함께 트럼프에 대한 기대는 날아가 버렸다고 전했다. FT는 트럼프의 발언은 "전후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근육질 자랑"이었다고 꼬집었다.
◇ 트럼프 “NATO는 무용지물”
이에 앞서 15일 트럼프는 영국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NATO를 무용지물(obsolete) 이라고 말한 뒤 이틀 더 숱한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NATO는 테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트럼프의 말이 옳다고 말하기 시작했다”라고 덧붙였다.
트럼프는 또한 NATO 회원국들이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정당한 몫을 지불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나라들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몫을 내지 않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9월 26일 미 대선후보 1차 TV토론에서 트럼프는 NATO에 대해 "28개 나토 회원국 중 많은 수가 적절한 자신들의 몫을 내지 않고 있다. NATO는 테러에 집중하지 않는다"라고 불만을 제기했다. 트럼프는 비용부담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더 이상 유럽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반면 트럼프는 대선 출마 이후 내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아주 호의적인 평가를 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 EU 지도자들 “트럼프 발언은 푸틴 입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
트럼프의 더타임스 인터뷰 내용을 전해들은 EU 지도자들은 경악했다. 트럼프가 쏟아낸 말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크-발터 슈타인 마이어 독일 외무장관과 노베르트 뢰트겐(Norbert Röttgen) 독일 연방 하원외교위원장 등 유럽지도자들은 일제히 우려를 표명했다. 마이어 장관은 “트럼프의 발언은 경악(astonishment) 이었다”라고 말했다. 뢰트겐 위원장은 “트럼프에게는 서방의 동맹이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여진다”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11월 옌스 스톨텐베르그 NATO 사무총장은 트럼프에게 "나홀로 가는 길은 유럽이나 미국이 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다. 지금은 유럽과 미국 간 파트너십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미국의 지도자들은 안정된 유럽이 미국에 심대한 전략적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우리가 현재 즐기고 있는 자유와 안전, 번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쉽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우리는 강력한 미국의 지도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유럽인들도 공정한 분담금을 부담할 필요가 있다"라고 역설했다.
◇ 트럼프 “브렉시트는 매우 잘한 일”
유럽지도자들이 분노하는 다른 이유는 그가 공공연히 브렉시트를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면서 EU의 해체를 부채질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15일 영국 더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신 영국인들은 아주 대단하다(great).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추켜세웠다. 트럼프는 이어 EU가 난민 위기로 깊은 손상을 입었다면서 다른 EU 회원국들도 영국을 따라 EU를 떠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국민과 국가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원한다"면서 영국이 브렉시트를 택한 것도 자국만의 정체성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브렉시트를 칭찬한 트럼프의 발언은 과연 EU 분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의 발언은 즉각 다양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마뉘엘 발스 전 프랑스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는 유럽의 분열을 부채질하고 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유럽인들은 단결해야 한다. 우리가 누군지 보여줘야 한다”라고 분개했다.
트럼프는 취임 후 몇 주 안에 영국에 양자 간 무역협정을 제안할 것이며, 메이 총리도 빠른 시일 안에 만나겠다고 밝혔다. EU의 품을 벗어난 영국이 미국과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메르켈 총리, EU결속 도모할 책임감 커져
브렉시트 협상에 긴밀히 간여하고 있는 EU 고위 관계자는 “영국이 미국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유럽국가들은 더욱 밀착하기를 원할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 입장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EU 결속을 도모해야 할 중요성이 커졌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에게 맡겨진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뢰트겐 위원장은 비록 트럼프가 선거 과정에서 EU와 NATO를 겨냥해 강한 말들을 쏟아냈더라도 취임 날짜에 가까워질수록 발언 수위가 부드러워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고 말했다. 뢰트겐 위원장은 “트럼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했던 말을 고스란히 다시 했다. NATO는 무용지물이며, EU가 쪼개지더라고 개의치 않겠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트럼프는 서방의 결속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프란스 팀머만스 EU 집행위 부위원장은 “오래지 않아 워싱턴 사람들이 미국의 전략적 이익은 강한 EU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프랑스 외무장관 “단합된 유럽의 힘 잊지 말아야”
장-마르크 에로 프랑스 외무장관은 트럼프의 발언 앞에서 EU가 똘똘 뭉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발언에 대한) 가장 좋은 응답은 유럽의 결속이다. 브렉시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유럽을 지키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하나의 블록으로 뭉치는 것이다. 트럼프가 우리를 결속하게 만들고 있다. 단합된 유럽의 힘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 대선 이후 트럼프 진영과 접촉을 해 온 유럽 정치인들은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도널드 터스크 EU 정상회의 의장과의 전화통화에서 가장 먼저 “EU를 떠날 다음 나라는 어디인가”를 물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이탈리아 오성운동 등 EU 탈퇴파, 트럼프 발언 반색.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등 EU 탈퇴를 주장하고 있는 정치세력들은 트럼프의 발언에 반색하고 있다. 오성운동의 선임 법률 담당인 마닐리오 디 스테파노는 트위터를 통해 “세계의 변화는 동쪽으로부터 오고 있다. 정체됐던 기존 질서(status quo)가 모든 면에서 흔들리고 있다. 우리 역시 그런 변화의 일부”라고 말했다.
디 스테파노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NATO 탈퇴를 묻는 새로운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는 “NATO는 우리의 생명을 놓고 희롱을 하고 있다. 우리의 영토와 우리의 군기지, 우리 병사들은 파워 게임의 인질이 돼서는 안 된다. 역대 미국대통령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인질이 돼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 트럼프,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 근본부터 흔들어
트럼프는 서방의 정치‧외교‧군사적 질서만 흔드는 게 아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축으로 작용을 해온 브레튼우즈 체제의 근본마저 건드리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는 세계무역기구(WTO)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의 탈퇴 혹은 재협상을 부르짖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195개국이 서명을 한 파리기후변화협약도 무시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동안 ‘아시아 회귀’ 정책의 일환으로 강도 높게 추진해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사실상 좌초 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주요 2개국(G2)으로 불리는 중국과 미국은 21세기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왔다. 중국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축으로 작용을 해온 브레튼우즈 체제에 버금가는 무역과 투자, 금융 구조를 만들어냈다. 중국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을 통해 무서운 기세로 중국 중심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TPP는 이 같은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이었다. TPP는 지난 2005년 뉴질랜드와 싱가포르, 칠레, 브루나이 4개국 간 무역장벽 철폐를 목표로 출범한 ‘환태평양 전략적 경제동반자협력체제(TPSEP)에서 비롯된 것이다. TPSEP는 2008년 미국이 가입을 하면서 TPP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TPP는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아시아 회귀’ 전략의 일환으로 채택하면서 미국 주도의 강한 드라이브가 걸리게 된다. 2010년 말레이시아, 베트남, 페루, 호주로 범위를 넓힌 데 이어 2011년 멕시코와 캐나다, 2013년 4월 일본 총 12개국으로 세를 넓혔다. TPP가 발효될 경우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하는 거대 경제권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원대한 구상은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추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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