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0일까지 갤러리마리 ‘영원한 모더니티 Ⅱ’전
[화이트페이퍼=임채연 기자] 독특한 방식과 사고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는 이영섭 작가. 그의 행보에 세계미술계가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주요 갤러리들의 러브콜이 이어지면서 작업장도 유럽 등지로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개인전이 7월20일까지 걀러리마리에서 열린다.
이영섭 작가는 자신의 조각을 '발굴 조각'이라 말한다. 평론가들 또한 그의 조각을 '출토 조각'이라 지칭한다. 주로 고고학이나 역사학에서 다뤄지는 '출토'와 '발굴'이라는 행위를 현대 조각과 결합하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30여 년 전, 작가는 실제 옛 유물이 출토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조각의 일반적인 제작 방식-깎고, 다듬고, 쪼아내고, 붙이는 등-을 벗어나 어디서도 본 적 없고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기법을 조각에 도입했다.
먼저 밑그림을 그린 후 구상한 작품의 크기와 형태에 맞춰 마사토질의 땅을 파낸다. 여기에 다양한 오브제와 정확한 비율로 배합한 재료를 붓고 덩어리가 굳어지기를 기다린다. 길게는 한 달 이상, 수개월을 묻어두기도 한다. 그런 다음 땅속에서 굳어진 조각을 꺼낸다. 그렇게 발굴한 조각은 흙이 묻어있고 땅의 내음이 배어있으며 오랜 풍화를 겪은 듯한 흔적을 품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조각의 흙을 털고 물로 씻어내는 최소한의 손길만을 더한다.
유물을 출토하는 것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형상들은 현재진행형의 조각이 아닌, 먼 과거로부터 온 존재처럼 믿기지 않는 질감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사람의 손이 덜 닿았고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완성해서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묻어두고 어쩌면 그것들이 땅속에서 스스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이러한 작업은 보편적인 상식과 과정을 역행하는 낯선 방식이다.
완성된 조각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투박하고 단순하며 절제되어 있다. 대략의 얼개만 있을 뿐, 원래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이영섭의 조각에서 느껴지는 순수와 선함의 감정, 묵직한 깊이감 등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미완의 형상으로 획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간성과 자연성을 배가시키는 발굴기법은 기교가 없는 질박한 아름다움, 여백과 비움의 한국적인 미와 잘 맞아떨어지면서 지금의 조형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의자, 노트북, 어린왕자 등 친숙하고 현대적인 소재를 선보이면서도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한국의 미다. 작가에게 있어 그간의 지난한 과정들은 한국 구상 조각의 계보를 이어가고자 하는 신념이었으며,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영섭 작가에게 잘 만드는 것보다 중요하고 절대적인 것은 작품에 불어넣은 '시간성'이다. 작가의 의도와 의지를 반영할 수 있는 것은 비어있는 공간에 형상을 만들어줄 재료를 붓고 흘려보내는 것까지이며, 그 이후 땅속 공간에서 형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오로지 자연과 시간의 몫이다. 기능이나 기술이 아닌 대상과 진정으로 교감하고자 하는 작가의 철학과 사유 방식이 작업의 모든 과정에 덧입혀짐으로써 이영섭의 조각들은 긴 생명력을 가진다. 무작위와 우연이 빚은 조각, 그 이면에는 시행과 착오를 거듭하면서도 기존의 통념에 얽매이거나 머무르지 않고 삼십여 년의 세월을 매진해 온 작가의 올곧은 '시간'이 새겨져 있다.
“현실과 실제가 과연 그가 추구해 온 이미지에서 얼마나 먼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가 우연히 고달사지 발굴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은 1998년의 일이었다. 발굴 현장의 흙은 그가 알고 있던 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지된 악마적 시간성을 뚫고 마각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맥박이었다. 그렇게 이영섭은 ‘출토’의 의미가 갖는 지정학적, 문화사적 문맥과 그 또 하나의 생산성에 전율했고 발굴이라는 ‘행위성’에서 원효의 ‘깨달음’을 일순간 체험한 것이다. 발굴 현장에서 기술과 기능의 ‘전승자’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는 중개인으로서의 진정한 ‘조각가’의 역할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추구했던 이미지의 감각적인 온전함이 주는 쾌감과 실제에 대한 부족한 인식이 주는 부담감 사이의 부채감이라는 빚을 일시에 탕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이원일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