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문학과 하나가 되었다
그 남자는 문학과 하나가 되었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11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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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꿈꾸는 대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직업을 선택하고 살아간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 2015)의 생도 다르지 않았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다가 농업을 위해 대학을 진학한 그가 문학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문학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쩌면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운명적 만남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동적인 삶을 살았던 스토너에게 문학은 능동적인 삶으로 전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삶의 중심엔 문학이 있었고 그것만이 전부가 되었다. 문학에 대해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친구들이 참전을 선택했을 때에도 그는 대학에 남았다.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는 삶이 얼마나 버거운 것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문학을 사랑했을 뿐이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159쪽)

공부를 계속하며 강의를 맡았고 첫눈에 반한 이디스와 결혼 후 딸 그레이스가 태어났다. 안정적인 삼각형 구조를 이룬 그런 완벽한 삶이 시작된 듯 보였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아내와 소통하지 못한 것처럼 스토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학문에 매달렸다.

문학은 무한의 존재였다. 때문에 자신 자신이 문학과 완전히 겹쳐 칠 수 있는 순간을 갈망했다. 문학과 하나가 되기 위한 길에 교수의 권위나 출세는 들어올 수 없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옳다고 믿는 자신의 교수법을 고수하고 뒤늦게 만난 캐서린과의 사랑도 포기해야 했다. 스토너의 생에 융통성은 찾을 수 없었다. 이디스와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지속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생에 대해 자신 있게 이의를 제기할 이가 몇이나 될까. 그는 정말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을 뿐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時)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353쪽)

우리는 생에 가장 중요한 건 목적을 위해 소진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은 성공이나 명예 혹은 사랑을 목적이라 여기며 다른 수많은 목적이 있다는 걸 모른다. 스토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인 문학을 향해 살았다. 그는 죽음을 암시하는 암과 마주했을 때에도 문학을 원했다. 단언컨대 그의 마지막 얼굴은 무척 평안했을 것이다. 자신의 길을 벗어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살아왔다. 쓸쓸하고 고독했지만 충만했다. 때문에 그의 삶은 숭고하고 위대하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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