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패션이 권력의 상징이었던 때 이야기다. 르네상스 시대 소위 ‘패션의 아이콘’이었던 잉글랜드의 왕 엘리자베스 1세가 소유한 드레스는 무려 3천여 벌에 달했다. 모두 절대적 왕권을 드러내도록 화려하게 디자인됐다. 여행을 떠날 때 300여 대의 수레가 대부분 옷가방이었다.
화려한 보석부터 온갖 장신구, 과연 움직임이 가능할까 싶은 거대한 드레스의 주인공이 그녀다. 자세히 보면 목에 몇 겹으로 두른 진주 목걸이도 있다. 드레스 자락부터 주름잡아 만든 러프까지 곳곳이 진주가 가득하다. 귀걸이도 머리띠도 그렇다.
진주는 순결과 처녀성의 상징이었다. 죽을 때까지 미혼으로 국가를 위해 독신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절대 권력을 지향하는 속내는 초상화 곳곳에 드러난다. 발 밑에 세계지도를 두고 좌우에 해와 번개를 그려 넣었다. 날씨마저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암시가 묻어난다. 패션과 뷰티를 명화와 엮어 재미있게 풀어낸 에세이 <아름다운 것들의 역사>(에이엠스토리.2018)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엘리자베스 1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터다.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그는 과거 대선 TV 토론에 나와 엘리자베스 1세를 자신의 역할모델로 꼽았었다. 생각해보면 비슷한 면면들이 많다.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 8세의 서녀로 태어나 잉글랜드를 극빈국에서 최강국으로 만들었던 여왕이고 국민통합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광명에 못지않게 복잡한 인물이었다. 비극적으로 어머니를 잃었고, 왕위 계승 3위라는 이유로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비혼자였다. 특정 종교에 몸담아 블러드 메리라 불렸던 이복 언니 못지않게 수천 명의 범죄자를 참수했다. 겉치레를 좋아했고 남성 편력도 만만치 않았다. 또 오랜 친구 로버트 더들리는 비선 실세로 군림했다.
책은 명화를 통해 다양한 패션·뷰티 아이템들의 역사와 이야기를 전하는 만큼 오늘날의 크고 작은 이슈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 있다. 명화 감상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벽을 넘는 데 도움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