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 cwmonitor
  • 승인 2004.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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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동 목사/기장 / 동명교회 담임목사/한국장로교 연합회 젊은목회자위원장

고대 로마제국의 역사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그 흥미진진함과 수많은 일화들로 인해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로마와 카르타고간의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은 가장 스릴과 반전의 묘미가 넘치는 스토리이다. 주전 2세기에 카르타고의 맹장 한니발이 코끼리 떼를 앞세운 대군을 이끌고,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가로 지르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 남부를 돌아 다시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의 뒤통수를 치는 대장정을 감행한 일화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결국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로마는 잠재적 경쟁자인 카르타고의 싹을 아예 잘라내고자 카르타고 시민 전체를 학살하거나 노예로 흩어버리고, 한 시대의 위대한 도시였던 카르타고를 무려 17일 동안 불태움으로써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평화였다. 로마 황제의 통치력이 미치는 모든 속주에 막강한 로마 군단을 배치하고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식민지에 대하여는 가차 없는 보복으로 유지하던 평화가 바로 유명한 ‘팍스로마나’의 실체 이었던 것이다.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인들은 ‘평화’에 대한 두 가지 단어를 다 알고 있었다. 하나는 라틴어인 팍스(Pax)와 다른 하나는 히브리어인 샬롬(Shalom)이다. 똑같이 ‘평화’로 번역되는 두 단어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른 것이다. 팍스가 힘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라면 샬롬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이다. 팍스가 무엇인가가 있어야 얻을 수 있는 평화라면 샬롬은 물질적 조건을 뛰어넘어 유지되는 평화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라고 말씀 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누구나 평화를 말하고 평안을 갈구하고 있다. 좁게는 내 마음으로부터 넓게는 전 세계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평화는 이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의제(agenda)이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 어떤 평화를 원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야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목회자들은 교인이 많이 모이고 큰 예배당을 건축해야 자신의 인생과 목회에 평화가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 어떤 교단들은 몇 천교회운동이 달성되고 또 몇 천 평의 총회본부 건물을 건축해야 평화가 온다고 목소리를 높여 주장한다.

더 나아가 많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라는 분들이 미국과의 혈맹관계를 굳게 지켜야 이 민족에게 평화가 유지된다고 그 뜨거운 신앙을 열성적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어떤 지식인은 말하기를 한국교회에는 십계명에 더해 제 십 일계명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라”는 계명이라고까지 한국 교회 일각의 숭미적신앙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평화는 샬롬의 평화가 아닌 팍스의 평화이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가 아니라 세상이 주는 평화이다. 더 신랄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 속한 평화가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숭배에 속하는 평화이다.

왜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렇게 바알의 평화를 아무 거리낌도 없이 흠모하고 찬양하고 숭배하게 되었는가? 말구유와 십자가의 신앙은 악세사리로만 남고 축복과 천당의 신앙만 충만하기 때문이 아닐까? 또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신앙은 기념비로만 남고 중세 교황청의 신앙이 우리 안에 팽배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런 세태와 풍조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준엄한 교훈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는 동시에 역사의 교훈도 읽어야 한다. 목사의 설교는 신앙과 복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역사와 시대의 안목도 무게 있게 담아내야 한다. 이 시대의 목회자는 제사장인 동시에 예언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두 나라 잠비아와 짐바브웨의 국경에는 유명한 빅토리아 폭포가 있다. 그 폭포의 전망대에 가면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그 폭포를 발견 했다는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동상이 서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위대한 선교사인 동시에 뛰어난 탐험가였던 인물을 존경한다. 그는 아무도 가 보지 않았던 미지의 땅에 들어가 사랑과 봉사의 일생을 몸으로 살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 남긴 그의 최초의 발자욱들이 원주민들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아이러니 앞에 할 말을 잃고 만다. 우리의 신앙적 열정에 역사의 안목을 더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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