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증거
세례 요한의 증거
  • 이재록 목사
  • 승인 2019.03.31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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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5)
이재록 목사
이재록 목사

1. 광야에서 외치는 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1:19~23)
  말라기 선지자 이후 이스라엘에는 영적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사백 년이 지나도록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없었지요. 로마의 속국이 되어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백 년이라는 침묵의 세월을 깨고 드디어 한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리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외침이지요. 그리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죄를 자백하고 세례받았습니다(마 3:1~6).
 이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은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지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만으로 생활하며 회개를 외치는 그의 등장은 신앙의 암흑 속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례 요한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유대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잘 아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물었던 것입니다.
 “네가 누구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네가 엘리야냐?”
 “나는 아니라.”
 “네가 그 선지자냐?”
 “아니라.”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에 하나님이 참 신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850명의 이방 선지자와 겨루어 불의 응답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는 성결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엘리야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새겨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라기 4장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는 예언을 믿고 엘리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달리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아니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그들의 거듭된 질문에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사명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고 전파하였습니다.

 2.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1:24~28)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엘리야도 선지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에게 백성이 가서 세례를 받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따져 물었지요.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물은 영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생수,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물이 몸의 더러움을 씻듯이 하나님 말씀으로 죄를 씻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세주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게 하고자 상징적인 물로 세례를 준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율법과 진리 안에서 언행이 바른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사람들에게 존경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메시아를 알리며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1:27) 하며 철저히 자신을 낮춥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고 따랐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그가 얼마나 겸손한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예수님이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분인지 깨닫게 하는 고백입니다.

 3.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다음 날, 예수님이 요단강으로 요한을 찾아왔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아무 흠이나 허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해 피조물과 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질서를 좇아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는 무수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자 받는 헌신과 희생의 세례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본 순간 성령의 감동 가운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쾌락에 빠지거나 명예, 권세를 얻기 위해 혹은 남보다 더 잘살기 위해 수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한 죄를 대신 지고 예수님이 처참히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동물 가운데 왜 어린 양에 예수님을 비유했을까요?
 그 이유를 양의 특성에서 알 수 있습니다. 양은 순종을 잘해서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갑니다. 누가 잡거나 털을 깎아도 저항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을 위해 털과 젖과 고기를 아낌없이 줍니다. 특히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양은 일 년 된 숫양으로 털도 부드럽고 사랑스럽습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청년과 같이 가장 아름다울 때이지요. 더구나 교미하기 전이어서 흠이 없는 깨끗한 상태입니다.
 예수님도 어린 양처럼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다툼이나 들렘이 없으며, 온유하고 깨끗하며 흠이 없었지요. 이러한 예수님께서 장차 죄인들을 위해 짐승처럼 화목제물로 드려질 것이기 때문에 어린 양에 비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적은 초신자를 가리켜 어린 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성도를 ‘양’이나 ‘하나님의 양’이라고 표현할 뿐 ‘어린 양’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4. 그는 하나님의 아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1:30~34)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늦게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이후에 성령 세례를 주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로 세례를 주는 영적 의미를 사람들이 알아야 이후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때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순서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장차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그가 곧 그리스도라 알려 주셨습니다. 과연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세례받은 뒤 물에서 올라오시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습니다(1:32~33).
 세례 요한은 이 장면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가장 먼저 성령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공급할 것을 알려 줍니다. 그러면 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했을까요?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온유하며 사람과 친숙한 새입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 것은 예수님께 실제로 비둘기가 내려와 앉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처럼 성령이 온유하게 임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에게는 강하게 역사하고 온유한 사람에게는 그 성품대로 부드럽게 임합니다. 하나님이 영안을 열어 주시니 세례 요한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이 임하는 장면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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