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3)
시간의 여행(3)
  • 크리스챤월드리뷰
  • 승인 2019.10.0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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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의 접점에서

주판을 발로 놓는가?

   1955년 나는 전차나 버스에 매달려 가며 통학할 수가 없어 집에서 걸어 30분 거리에 있던 덕수중학교에 지원했다. 창신초등학교 졸업생으로는 내가 이 학교에 지원한 유일한 학생이었다. 내 친구들은 거의 시내 쪽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남학교로는 경기, 서울, 경복, 휘문, 용산, 경동 등이 잘 알려졌었고, 여학교로는 경기, 이화, 창덕, 숙명, 진명 등을 선호했다. 주간 420명, 야간 150명 정도 모집하는데, 나는 주간에 지원했다. 시험은 거의 알고 있는 것들이어서 일찍 적어놓고 다시 읽어가며 몇 군데 고쳐 쓰곤 벨이 울릴 때까지 기다리다 제출했다. 며칠 후 합격자 발표에 가셨던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돌아오셨다. 내가 불합격한 것이다. 여동생은 창덕여중에 합격했다.

  다음날 어머니는 학교에 가서 그 이유를 따졌다. “우리 애가 시험이 쉬웠다며 거의 다 맞은 것 같다는데 왜 떨어졌느냐?” 그 이유를 알려고 가셨다. 학교에서는 이렇다 할 이유를 말해주지 않아 어머니는 내가 시험을 못 봤을 리 없다고 확신하시곤 교장실로 들어가셨다. 교장 선생은 처음에는 구차하게 변명을 하다 하도 어머님이 조리 있게 따지니 “우리 학교는 주판 놓는 학교라 불구자(不具者)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불합격의 이유를 밝혔다. 어머니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니, 주판은 손으로 놓지 발로 놉니까?” 어머니의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언변과 강인하고 날카로운 성격에 자식을 보호하려는 모성 본능이 더해져 불같이 폭발하신 것이다. 하지만 교장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면담을 마치고 나와 현관을 나오시다 멀찌감치에서 오시는 어느 선생님을 붙잡고 “우리 아들이 왜 떨어졌느냐, 성적은 어느 정도 되었냐?” 등 물으시며 하소연하니 그 선생님이 어머니께 “아들은 36등으로 합격했는데, 워낙 학교 방침이...” 그러면서 자신의 딸이 세 살인데 소아마비로 집에 있다며 말끝을 흐렸다는 것이다. 훗날 알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치셨다.

  내 문제가 커지고 신문사와 문교부에 면담을 신청했는데 이런 기미를 알고 두어 주 후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다음 주부터 등교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처음부터 가고 싶지 않던 학교였는데, 철퇴까지 맞았으니 3년을 지날 생각이 끔찍스레 떠올랐다.

  아버지는 입학 선물로 젊어서부터 사용하시던, 매우 아끼던 금 펜촉 만년필과 세이코 시계를 사 주셨다. 우리 반 80여 명 중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학생은 몇 명 안 됐다. 이 두 가지도 내겐 보물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날자 나오는 시계를 선물 받을 때까지 6년간 내 팔뚝과 긴 인연을 가졌던 시계, 어느 날 심심해서 뜯어보다 톱니를 움직이는 태엽이 퉁겨나가 고칠 수 없어 결국 그 시계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보물 목록에서 지워 버렸다.

  조회 때마다 운동장 둘레 미루나무에 매달아 놓은 나팔 스피커에서 왱왱 울리며 쏟아져 나오는 교장의 훈시는 아침마다 내 머리와 가슴에 못을 박는 고통스러운 고문이었다. 매일 주판 경시대회 이야기 아니면, 졸업생 몇 명이 어디에 취직했다는 등 그저 그런 이야기와 삼척동자도 알만한 속담 등을 풀이해 가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가운데골을 타 찌꾸(포마드) 바른 머리와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동그란 얼굴, 그리고 KFC 영감 같은 똥배 등등 이런 게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내가 3년간 드나든 이 학교 교문은 나 개인에게는 지옥문이었다. 3학년 2학기 겨울 어느 날 나는 그를 학교에서 더는 볼 수 없었다. 며칠 후 교장 선생님(徐廷權)이 새로 부임해 오셨다. 근엄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분이었다. 조회 때 하시는 말씀은 전 교장과는 너무 차이가 났다. 늘 우리를 젊은 학도라며 장래 이 나라를 새로 세워나갈 일꾼들이며 희망이라는 말씀과 야망을 품고 내일을 향해 전진하라는 등의 말씀을 자주 하셨다.[참조: 한숭홍,「학창시절 1」, 『유리온실』(시집2), 서울: 문학공원, 2019, 86~87면.]

날개의 부활

  1958년 3월 나는 덕수상고에 진학했다. 이미 지난겨울 교장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왔고,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많은 선생님이 전근 가시고, 새로 부임해 오시면서 교육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3년 같이 공부하던 학우들이 다른 학교로 많이 옮겨가고 신입생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면학 분위기도 바뀌었다.

  개학하는 날부터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나에겐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다. 친구들과 지내는 시간도 너무 아름다웠다. 중학교 3년 동안의 지옥 생활 속 무기력함, 침묵, 우울함, 경계심, 인간에 대한 불신감 등은 한순간에 말끔히 씻겨나갔다. 이렇게 인간의 성격과 성향, 기분 등이 환경에 따라 급변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때 나의 기분을 비유적으로 말해보면, 마치 껍질 속 어둠에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처음 보는 세상에 대한 경탄과 신기함, 또는 암실에서 나와 햇빛을 맞으며 각막에 들어오는 눈부심 같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고등학교 3년은 나에게 해방 공간을 살아가는 기분과 자유를 누리며 그 진정한 의미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3년 동안 나는 소설책, 시집 등을 많이 읽었고, 신문 첫 면에서 마지막 면까지 매일 완독했다. 음악, 특히 고전 음악은 거의 매일 듣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꿈꾸는 소년이 되었다. 때로는 왈츠를 추는 소년이 되기도 하고, 바이올린을 켜는 소년이 되기도 하고, 지휘자가 위대하다고 생각될 때는 음악을 들으며 지휘자가 된 듯한 그런 기분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영어를 배우려고 펜팔을 시작했는데, 많을 때는 10여 명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핀란드, 독일, 캐나다, 영국, 미국 친구들은 물론 일본 친구와도 펜팔을 했다. 지금도 핀란드 여자 펜팔 친구가 자신의 금발 머리카락을 잘라 보내준 것을 가지고 있다. 독일 여자 펜팔 친구는 편지를 보내도 오랫동안 답장이 없었는데, 어느 날 오빠로부터 병으로 입원해 있다 죽었다는 부고 편지를 받았다. 며칠 동안 그 친구 생각을 하며 편지상자에서 그동안 받은 편지를 꺼내 읽으며 명복을 빌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우표도 수집했고, 동전, 포스트 카드 같은 것도 수집했다. 그 당시 고등학생들에게 이런 게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교회 친구 박영길은 광석라디오를 잘 만들었는데, 배터리나 어떤 기계장치도 없이 광석과 고물 전화기 속 리시버를 방산시장 쪽 어느 담벼락 노점상에 같이 가서 사와 만들어 주었다. 후에 그 친구는 전기를 잘 다루어 KBS에 취직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우리 집은 묵정동에 있는 신광교회에 출석했다. 교회 뒤쪽에서 길 건너 골목으로 몇 분 걸어가면 전쟁 중에 순교하신 목사님 가정이 여러 채 모여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순혜원이라는 곳인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거의 신광교회에 적을 두고 다녔다. 그곳에서 오는 친구들도 친하게 지냈는데, 모두 순하고 착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나는 성가대도 하고 주일학교 반사(교사)도 했다. 최건환, 김미용, 이정심, 허희복, 김증자, 정경순, 우리보다 위로는 김동호, 이성갑, 하영호, 허팔복 등등. 이들이 신광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최건환은 목소리가 좋았다. 미용이는 주일학교 풍금 반주를 했는데,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의사시험에 합격해 1966년 6월 24일 미국으로 떠났다. 미용이와 나는 주일 오후가 되면 영화관에 가기도 하고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남몰래 만나곤 했다. 남자 친구들은 주로 내기 당구를 치며 우정을 쌓아갔다. 따든 잃든 간에 당구 끝나곤 함흥냉면 집에 가서 냉면에 설탕 한 숟갈 넣어 버무려 먹는 게 전통이었다.

 

황원무, 조윤제, 이호창, 박영길, 윤태성 등은 교회 절기 때마다 무대 장식을 하고, 금종이에 천사를 그려 오려 붙이고, 색종이 고리를 만들어 걸고 오색 테이프를 드리워 걸고... 크리스마스 때는 창호지로 등을 만들어 들고 동네를 돌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 우리 집에는 언제나 마지막에 온다. 캐럴이 끝나면 어머니(권사님)가 밖으로 나가 집으로 불러들여 과자와 따끈한 커피를 제공한다. 몇 시간 동안 언 몸을 훈훈한 방에서 녹이며 지내다 가곤 한다. 어떤 때는 떡국도 제공했다.

초월적 상상

  고3 즈음부터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참 용기도 대단했다. 무지에서 오는 용기랄까. 감히 어떻게 시를 써. 하여튼 철없는 나이였기에 가끔 시를 썼다. 사실 그즈음 나는 시의 문학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많은 시를 읽어 머리에 맴돌던 시상을 엇비슷하게 엮어본 것이었으니 훗날 읽으며 창피스러워 없애버렸다. 그러나 시에 대한 매력마저도 찢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에게는 음악을 들으며 환상에 사로잡혀있던 나를 그려보곤 했던 것 같고, 문학에 심취하며 상상의 세계에서의 나의 삶이나 세계관에 집착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이상에 사로잡혀 나는 내가 중학교 입학 때 겪었던 삶의 양면성과 인간의 야누스 같은 모습 속에서 생명의 경이란 결국 이율배반적인 모습의 일체성이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지금 내가 나의 삶을 회고하며 써나가는 이 글 자체가 사실은 나의 단면을 나의 감정과 환상적 세계관에 도취한 상태에서 어둡게, 때로는 밝게 엮어가는 것일 텐데, 이럴 때마다 나는 점점 더 깊은 회의와 정서적 느낌에 끌려가며 문학적 에로티시즘에 관심을 가지고 음악, 미술, 조각, 심지어 내가 공부하고 싶었고, 공부했던 학문 분야에서까지 연결해 보곤 한다. 너무 지나친 비약이고 초월적 상상이라 현실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신은 늘 그런 기분과 정서 속에서 새날을 맞고 숨 쉬며 즐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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