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여행(22)
시간의 여행(22)
  • 勁草 한숭홍 박사(장신대 명예교수)
  • 승인 2019.11.0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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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칸디나비아
찻길 막혀 눈 덮인 어느 마을에서(좌) 여행지도를 보며(우)
찻길 막혀 눈 덮인 어느 마을에서(좌) 여행지도를 보며(우)

비겔란 조각공원

   오늘 일정의 마지막 코스는 프로그너 공원 내에 있는 비겔란(Gustav Vigeland)의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공원도 평화롭고 아름다웠지만 내 눈을 끄는 것은 직선으로 뻗은 중앙로의 좌우에 세워진 비겔란의 조각상들이었다. 이곳을 찾은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 모든 예술은 예술가의 구상을 소재화하여 표현한 것 일진데, 특히 조각의 경우는 그 창작 행위가 구상 작업뿐만 아니라 표현 기법에 따라 미학적 의미와 표출하고자 하는 작가의 창작성이 평가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면 작가 자신의 삶, 그 속에서 솟구치는 욕망과 생명력, 영혼의 무한한 흐름, 시간과 공간을 함몰시키고 있는 초월성, 작가의 세계관과 인간관이 농축되어 탄생하는 것이라 하겠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며 무언가 배울 수 있고 새로운 이상을 찾을 수 있기에 천천히 훑어보고, 눈과 머리로 읽으며 해석하는 과정으로 그 앞에서 경외감을 느꼈다. 나는 이런 순간에 몰입하는 버릇이 있는데, 내 눈에 오직 지금 보고 있는 작품 외엔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각에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으므로 조각의 위대성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부담스럽다. 상업주의에 편승한 조각이 지루함과 짜증스러운 권태감을 던져주는 데 비해서 참 예술혼이 깃든 작품의 경우는 그 존재성이 지속하기 때문에 시간의 관점에 따라 계속 의미화된다.

 

레나테(좌) 오슬로로 가며 차창 밖 풍경(가운데)  스톡홀름역 근처 카페에서(우)
레나테(좌) 오슬로로 가며 차창 밖 풍경(가운데) 스톡홀름역 근처 카페에서(우)

   비겔란의 조각 하나하나에는 인간의 본성에서 표출되는 욕망, 사랑, 인간성과 사회성이 얽혀 있어, 단조로운 조각 한 점에서 받는 느낌과는 비교가 안 된다. 어쩌면 내가 조각가도 아니면서 철학적 미학과 예술철학을 배운 지식으로 조각에 관해 이렇게 관조하고 있는 것이 전문가들이 보기엔 문외한의 독단적 해석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자신도 그 점을, 그런 비판을 수용하는 자세다. 어쨌든 모든 예술은 세계를 해석하고 인간의 삶을 표현하려는데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내가 가장 감명 깊게 감상한 것은 계단을 올라가서 중앙에 세워진 20m쯤 되어 보이는 조각 기둥(monolith)이었다. 수백 명의 나체상이 엉키고 설키고, 붙어 생명의 경외감, 사랑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나는 해석하며 작품을 읽어갔다. 감상자에 따라서는 인간의 아귀다툼을 형상화한 것, 지옥의 모습 같은 현상을 추상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상승하려는 욕망, 서로 짓밟고 먼저 올라가려는 현대 사회의 인간상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며 표상 행위를 거쳐 개념화된다는 것은 작품이 의식을 거쳐 감상자의 예술관으로 정립되어 간다는 의미다.

   모노리스를 감상하며 비겔란이 인도 여행을 한 적이 있거나 인도 종교와 문화에 관한 자료와 사원 사진이 실린 화보를 본 적이 있지 않을까 내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인도 카주라호 힌두교 사원 외벽에 다양한 나신의 조각과, 남녀의 성애와 성행위를 표현한 에로티시즘 등이 비겔란의 작품을 감상하며 겹쳐지곤 한다. 카주라호 사원 외벽 조각은 ‘성(聖)과 성(性)’, ‘성(聖)과 애(愛)’의 일체감을 종교의 진수로 부각(浮刻)해 표현한 예술 조각이며, 그 자체로서 종교성의 상징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일하며 예술 자료들과 종교 화보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감상하며 이렇게 느꼈다.

   15일(월) 오늘 일정은 회네포스를 거쳐 오슬로에서 206km 북서쪽에 있는 골에 가서 하루 쉬며 800년 된 목조 스타브 교회 및 노르웨이 전통 목조 건물 몇 곳을 가볍게 구경하고 돌아와 스웨덴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차편이 끊기고 관광 명소도 겨울에는 문을 닫아 중도 어느 마을에서 오슬로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새 여행계획을 짜야 했다.
   오슬로에 돌아와 쉬엄쉬엄 눈 쇼핑도 하고, 카페에서 석양빛에 물든 하늘과 잔물결이 이는 바다, 수평선 넘어 그 너머를 상상해보며 휴식을 취했다. 보고 즐기는 여행의 맛도 있지만, 낯선 이국의 풍물과 생활 모습을 보며 느끼고, 그 속에서 무언가 깊은 인상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여행의 좋은 추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af Chapman(1949년부터 유스호스텔로 사용)(좌)  스웨덴 의회(Riksdaghuset)(우)
af Chapman(1949년부터 유스호스텔로 사용)(좌) 스웨덴 의회(Riksdaghuset)(우)

스톡홀름

   16일 오후 10시 15분 야간열차로 스톡홀름으로 출발했다. 겨울인 데다 북극지방이라 낮이 너무 짧았다. 기차는 숲과 평원을 달린다. 호수는 달빛에 반짝이고 큰 호숫가에 드문드문 있는 오두막 같은 집은 어렴풋이 윤곽만 드러내고 있다. 스쳐 가는 차창 밖 풍경은 을씨년스럽고 쓸쓸해 보였다. 그러면서 이런 곳에서 무얼 하며 살아갈까, 이런 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도 많았는데, 작은 연못만 한 곳에서 큰 호수, 한참 달려야 하는 긴 호수 등등 어둠 속에서 눈 사이로 호수 구경하는 것도 신비로웠다.
   잠시 눈을 붙였다 깨어 차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어둠 속의 풍경은 달라진 게 없었다. 좀 지루하다는 생각이 밀려오지만, 나는 이런 경험도 여행의 별미라는 생각을 하며 스쳐 가는 차창 밖 경치를 열심히 눈에 담았다. 다음 날 아침 7시 37분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오슬로에서 스톡홀름, 9시간 22분의 긴 장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몸의 균형이 흐트러져 휘청이며 내려왔다. 역 근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택시로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유스호스텔은 af Chapman이라는 커다란 요트였다. 원형 그대로 폐선된 요트였다. 폐선도 이렇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침실은 좁고 불편스러웠으나, 이런 유스호스텔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흔하지 않은 이런 기회도 여행 중에 경험하는 좋은 추억이 되리라는 데 의미를 두었다.

   스톡홀름은 도시 전체가 조용하고 한적했다. 오슬로와 다른 풍광을 찾으려 했지만, 도시가 풍겨내는 분위기는 거의 비슷했다. 며칠 지내고 떠나는 여행객의 눈에는 두 도시의 생활 양식과 주거 형식 등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뚜렷하게 구별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받은 인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바닷가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 마리나에 나란히 정박해 있는 요트들, 건축 양식도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의회 주변
의회 주변

도심에는 현대식 고층 빌딩이 거의 없어 옛 모습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도시를 상징하는 뚜렷한 랜드마크가 없었다. 반세기 전의 스톡홀름을 지금 관광객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텐데, 그 시절 유럽은 파리와 로마 정도 외에는 관광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고, 더욱이 노르웨이나 스웨덴은 거의 관광지로 매력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슬로에서 스톡홀름으로 오는 기차에서 10시간 가까이 앉아있었기에, 오늘은 쉬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시내 관광은 내일로 미루고 카페에서 일정을 의논하며 오랜만에 찾은 여행에서의 게으름을 만끽했다. 레나테는 내 짐까지도 합쳐 큰 가방에 넣고 이동할 때마다 들고 다녔기 때문에 힘들고 피곤했을 텐데도 짜증 한번 안 내고 늘 웃는 얼굴로 대화한다.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사실 이번 여행은 나를 생각해서 동행한 것이었다.
   난 항상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데, 정확히 말하면 낙천적이다.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게 내게는 아름답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여행지에서 예기치 않게 맞닥뜨리는 생소함도 내게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아름다움에 접하고 싶은 경향으로 나타나곤 한다. 스톡홀름이 내게 매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는 것이고, 공간의 흔적이 원형적이라는 점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의 복합적 뒤엉킴과 시간과 공간을 급진적으로 변질시키며 전쟁하듯, 서로 투쟁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낙원의 지상적 표현은 시간과 공간의 원초적 양태에 가깝다는 말이 아닐까?

  

스톡홀름의 겨울 바다
스톡홀름의 겨울 바다

스톡홀름에서의 4일은 스웨덴 의회와 왕궁, 의회 주변과 시내 곳곳을 쉬엄쉬엄 구경하고, 도시의 생활상을 눈여겨보며 지냈다. 여행의 목적은 될 수 있는 대로 무엇이든지 많이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곳의 삶에 잠시나마 동화하여 함께 숨 쉬고 접촉하며 지내는 것이라는 게 나의 여행 관이다. 겨울이 길어서 그런지, 바다에서도 눈에 띌 수 있게 하려고 배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슬로 시청과 마찬가지로 스톡홀름 시청도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종탑이 건물 한쪽으로 아주 높이 솟아있었다.

   3월 20일(토)은 경숙과 친구들에게 포스트 카드를 보내고,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 12일간의 북유럽 여행이 내게는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으며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인간의 발길이 덜 밟힌 곳―1970년 당시―에서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체험하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곳의 삶에 묻혀보았고 생활해보았으며 경험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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