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산은 산, 물은 물
  • cwmonitor
  • 승인 2004.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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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관 부장

“어디 좋은 소식, 가슴 뭉클한 이야기 없습니까. 허구한 날, 치고 박고 쌈 싸우기만 하실 겁니까?”
어느 날 어느 독자가 말을 건네왔다. 갑작스런 따끔한 힐책에 머리끝이 순간 쭈뼛했다.
헐뜯고 비판하고 공격을 일삼다보면 정작 본질에 서로가 상처만 줄 수 있다는 충언이었다.
“기자님, 이제 인상 좀 펴 보일 수 없을까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어느 스님의 어록이 생각난다. 쉽게 말해 돌덩이는 돌덩이의 본질을 지녔을 뿐, 그 돌덩이를 그럴싸하게 금칠 한다고 해서 금덩이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금덩이의 가치와 본질은 변할 수 없는 가치와 본질 그 자체이기에 그 아무것도 덧붙일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네 삶에서 한 번쯤 되새겨 볼만한 금언이다. 아직도 교계의 주위에는 이게 돌덩이인지 금덩이인지 본바탕을 분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질을 망각하고 숨기는 행위는 아무리 그 일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본질을 속일 수가 없다. 요즘 교계의 뉴스를 다루다보면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그렇다고 공격 때문에 본질까지 망각할 수는 없다.

기독교사상의 핵심은 관용과 용서, 사랑을 통해 행복하고 평화로운 박애주의 세계국가 건설에 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당시 바리새인들을 대표로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적 이중성을 맹공격하여 인간적 본성의 솔직함을 강조하였다. 또 부자들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으름장을 놓음으로써 부의 재분배를 통한 지상의 복지국가 건설을 추구하였다. 이게 기독교의 본바탕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기독교를 정치적 민중의 압제 수단으로 활용, 기득권 수호자들의 권력의지가 예수를 우상화시켜 권력의 방패막이로 악용하는 경우가 흔하게 발생되곤 한다.

인상을 펴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웃을 수 없는 현실이 애석하기만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경은 오늘날 시대의 변천과 관계없이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고, 가감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에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과연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옳게 알고 따르고 있는 것일까. 그 진리가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으면서 편가르기의 도구로 사용되는 건 아닐까.

예컨대 70년대 전·후반까지는 당시 한 동네에 기껏해야 텔레비전 서너 대 있던 시절이었다. 인기 드라마나 인기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전쟁을 소재로 만든 작품들이었다. 치고 박고 하다가 적군이 궁지에 몰려 전멸했을 때의 그 통쾌함, 바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면서 환호했던 장면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마치 올림픽 유도경기에서 상대선수를 순간적으로 매트에 내리꽂아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한판승처럼.
이렇듯 지금 세계는 냉전시대를 거쳐 화해의 분위기로 돌아섰다. 요즘, 적군과 아군의 구별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하고 소련군과 공산군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도 적이라는 규정도 무시했다.

요즘 기독교계는 화해와 용서보다는 교권주의에 붙잡혀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세계화 흐름을 무색케 하고 있다. 어제의 이단은 오늘도 당연히 이단이라는 영원한 주홍글씨를 새기고 마는 현실을 안고 있다. 검토와 검증의 자리조차 마련치 않으려는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아집은 세월만 묶고 있다고 풀이할 수 있다. 교권주의가 포용과 사랑을 내세우기보다는 이해관계의 득실만을 따져 진리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나와 다르다는 현상은 상대적이다. 나도 남에게 다를 수 있는 까닭이다. 언제 철옹성 같은 담벼락이 허물어질 것인가. 허물없이 손을 내밀 그 날은 알 수 없다고 하겠지만, 그보다도 먼저 적대시를 접고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데 애쓰는 자세가 급선무인 것 같다. 과거에 옭매인 처신은 설득력이 없다.

지금의 시각에서 옳고 그름의 진상을 따져 밝히는 것이 현명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언제까지고 서로에게 깊은 상처의 골만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자양반, 이단이고 삼단이면 어떠냐. 지금 내 삶이 평안하고 기쁜데 뭘 바꾸란 것인지 모르겠다. 이 나이에 까막눈인 내가 어떤 방식으로 다시 예수믿으라는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예수를 누구보다 잘 믿고 있고, 이 믿음이 진정한 ‘천국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이 믿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어느 모임에서 서로가 대화하는 가운데 이단교회로 낙인찍힌 교회에 다닌다는 나이 지긋한 어느 노 권사의 이 한마디. 아직도 내 가슴속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jjk6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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