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시절 그목사님이 그립다
그시절 그목사님이 그립다
  • cwmonitor
  • 승인 2004.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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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관 부장

볏알이 영글어가는 이맘때가 되면 나는 몸살을 앓는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한차례 몸살과 씨름하고 나면 꼭 망념에 잡혀있다 빠져나온 느낌이다. 계절병이러니 하고 덮어두기도 하지만, 그날이후 도져진 이 고질병은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동심의 세계를 끄집어 내 그 추억속에 잠기곤 하는 게 내 주책일까. 또 왜 하필 풍성한 가을일까. 하나님은 사색하기 좋은 계절을 택해 인생의 의미를 새기라고 몸살을 통해 은혜를 주시는 모양이다. 이럴 때 어쩌면 몸살이 내 영혼의 영약이 아닐까하고 자위를 해본다. 유년시절, 내가 다니던 교회는 농촌중의 시골교회였다. 예배당을 향해 쭉 뻗은 논둑길, 구부러진 길을 마다하고 그 위로 뜀박질하던 시절, 논두렁 아래로 발목이 빠지기라도 하면 신발은 박혀있는채 놔두고 발목만 겨우 쏙 빼서 지푸라기로 쓱 문질렀던 그때의 일 등이 문뜩 떠오른다. 그래도 뭐가 좋은지 하얀 이를 내놓고 “깔깔깔” 웃었던 그 시절이…. 전형적인 농촌교회, 그 주일학교가 좋았고 그곳은 행복의 놀이터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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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유난히 키가 크셨던 목사님은 내게 우상이었다. 항상 다정다감하고 존경스런 분이었다. 칭찬이라도 한 번 해주는 날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논둑길에서 두어 번은 넘어져야 집에 도착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냥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에서 넥타이 맨 분이 목사님 딱 한 분이셨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손수 자전거를 타시고 들녘을 가로질러 이집 저집 심방을 다니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분을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비틀비틀 집 앞까지 모셔다 드리는 풍경은 어린 내 기억속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목사님이 저녁무렵 자전거를 타고오시다 논둑길 옆 도랑에 빠지신 것이다.

양복이 진흙으로 흠뻑 젖어 있는 모습을 본 나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었다. 목사님은 나를 보시더니 “허허” 괜찮다며 지푸라기로 흙 묻은 양복을 쓱 문질러 툭툭 털고 일어나시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끌고 가시는 것이었다. 이때 내 얼굴은 붉게물든 저녁노을보다 오히려 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년시절 내게 우상이었던 한씨 성을 가진 이 목사님은 얼마후 다른 시골교회로 떠나셨다. 소식이 끊기고 오래 지난후 목사님은 교회종탑을 수리하기 위해 직접 높은곳에 오르다 낙상하여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접하고 끝내 장례식에 참석치 못한 후회감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있다. 청년시절의 이일은 지금껏 가을만 오면 찾지 않아도 찾아오는 고질병으로 자리잡았다.

얼마전, 기독교계 유력 월간지 ‘기독교사상’이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심포지엄을 연다고 한다. 기독교사상은 목회자 16명의 설교를 입체적으로 비평, 분석하여 설교가 성도들에게 어떤 형태의 신앙을 형성시켰는지, 설교의 문제점은 또 무엇인지를 되짚어보는 목적에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강단을 일깨운다는 면에서 이번 심포지엄은 자못 의미가 크다할 수 있다.
그러나 16명의 설교자는 성공적인 목회를 이끈 목회자라 할 수 있겠지만, 결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는 아닐 것이다. 자칫 이번 심포지엄이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말잔치가 되고 끝나 버리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신학교수 등으로 구성된 비평가들은 16명의 설교가들에 대해서 탁월한 언어구사, 청중을 압도하는 호소력, 개개인의 독특한 카리스마 등의 양념과 함께 신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아무쪼록, 처음으로 열리는 비평의 자리이기에 한국교회 전체목회자들에겐 성찰의 기회가 되는 뜻깊은 자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생각하건대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제일주의로 달려왔다. 크고 화려한 교회건물, 교인의 숫자 등이 교회성장의 잣대가 되어왔다는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공적인 목회 또한 외형적인 규모로 평가된다. 대부분 대형교회에 목회하고 있는 16명의 설교가를 선별한 기준에서 보듯 명망있는 설교가도 외적 성장과 무관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우리주위에는 작고 초라한 교회에서 사회로부터 소외된 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이름도 빛도없이 목회하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지극히 낮은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것이다’라는 말씀을 실천한 것뿐이라고 말하면서 겸손해한다.

이들이 혹 ‘교회성장’이라는 거대한 건물에 가려 숭고한 뜻이 잊혀지지나 않을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 훼손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
성장이 더디더라도 말씀이 바로서는 교회상,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보다 성도의 가슴을 안아주는 그런 목회자의 상을 바라는 것이 지나친 바람일까.

jjk6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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