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11-1)
시간에서 공간으로(11-1)
  • 크리스챤월드리뷰
  • 승인 2022.08.07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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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경주고적안내도 (1965년)
경주고적안내도 (1965년)

8월 7일 토, 맑음/ 경주에서


경주에 머물러있는 그리움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아침 6시 37분 포항에서 동해남부선을 타고 경주에 와 내리니 7시 45분이었다. 1961년과 1964년, 그리고 이번까지 3번째 들렸는데 그때마다 신라의 고도는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사면 팔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넓게 펼쳐진 평야 지대의 경주. 여기저기에 고적이며 고분들이 눈에 띄지만, 폐허 된 유적지와 허물어진 절터며 궁궐터의 주춧돌들만 곳곳에 보이니 전성시대의 신라 고도는 얼마나 찬란했으랴 라는 생각에 감회가 깊다.
  동해로 흘러가는 형산강 유역 경주에선 가뭄을 모른다니 이곳이 얼마나 축복 된 땅이랴.

  이곳 경주역에 근무하는 박선자 양, 작년 여름(1964), 방학 때마다 뜨내기처럼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내가 제주도로 가는 여행의 첫 목적지 경주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이틀간 함께 시간을 보냈던 여인인데, 전화를 받더니 깜짝 놀란다. 어떻게 왔느냐며 반기는데 그 웃음이며, 애교스러운 목소리가 피로감을 한순간에 날려 보낸다.
  김 목사님을 소개하고 찻방으로 자리를 옮겨 그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데 그저 반갑기만 하다. 서로 할 말이 많았다. 그녀는 올해(1965) 5월에 약혼했으며, 가을에 결혼한다고 한다. 재잘재잘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다 조심스레 이 말을 꺼낸 이유가 무얼까. 그 순간 우리 사이엔 미묘한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근무 중에 나왔기에 미안해하는데 자청해서 고적지 몇 군데를 안내해 주었다. 재회하여 반가웠는데 이렇게 시간까지 내어 안내해 주니 고마운 마음이 물씬 난다. 

안압지에서 선자 양과 필자, 김신환 목사
안압지에서 선자 양과 필자, 김신환 목사

  화랑로를 20여 분 정도 걸어가니 좌우편에 안압지와 기와 정자가 멀리 보인다. 옛날 전성시대에 찬란했을 이곳이 지금은 무성한 수련이며 이끼 낀 흙물이 고여있어 그지없이 황량하다. 그러나 옛 모습은 그대로 지녀 회포의 정을 느끼게 하니 서러워라, 그 마지막의 운명이 지금 이렇듯 쓸쓸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으랴.
  안압지, 정자 위에 푸른 이끼 낀 기왓장들 하나하나도 산 역사를 지닌듯하여 건성으로 보며 지나갈 수 없었다. 퇴색된 기둥이며 추녀며 그 어느 하나도 장구한 역사를 담고 있는데 어찌 가볍게 일람하며 지나칠 수 있으랴.
  못가 바위 위에서는 망중한의 강태공 여러 명이 낚싯대를 길게 드리워 놓고 시간을 즐기기라도 하듯 한가롭다. 정자 위에서는 노인 몇 명이 바람을 쐬며 쉬고 있고 낮잠을 자는 이들도 있다.
  석빙고에 들어가니 철책에 열쇠가 굳게 잠겨있다. 철책 너머로 들여다보는데, 아치형의 둥근 천정에선 물방울이 가끔 떨어지고 찬 기운이 확확 내민다. 이곳은 본래 겨울에 얼음을 저장해 뒀다가 여름에 임금님께 진상하던 얼음 저장소였다. 석빙고 옆 넓은 평지에 박물관을 옮겨 놓으려 한다고 설명한다. 

안압지에서 선자 양
안압지에서 선자 양

  이곳이 김알지(金閼智)가 나온 곳, 계림이라며 경주 김씨 중 계림 파의 조상이라고 설화 한 토막을 전해준다(초등학교 때 김알지, 박혁거세, 제주 삼성혈의 세 성씨 등에 관한 탄생신화를 읽은 적이 있음). 가만히 듣고 있던 김 목사님이 자신의 본관이라며 자랑한다.
  계림에서 첨성대로 내려갔다. 첨성대 상부에는 동남쪽으로 조그마한 창이 하나 있고 그 위에는 네 개의 석재가 얹혀 있다. 천문을 관측하던 곳인데, 몸체는 원통형으로 밑 부분에서 위로 올라가며 차츰 줄어져 상부를 이루고 있다. 이런 것이 신라 시대에 있었다고 하니, 그 당시 학술이 어느 정도 발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차츰 한쪽으로 기운다고 한다.

  여기에서 선자 양과 헤어졌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첫 만남의 순간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작년 이맘때 길을 묻다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는데, 그러더니 느닷없이 자기 집에서 밤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며 제안하여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저녁 대접도 잘 받았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우연스럽게 맺어져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1965.8.7.)

 

박선자 양과 관련한 첨가 자료

1) 1964년 여름 박선자 양에게 띄운 여행 엽서 3편[한숭홍, 『천사의 음성』(4집), 2021. 73쪽, 74쪽, 75쪽에 수록.]

여행 엽서 · 1

선!
여름의 해그림잔 길다지만
우리에겐 너무 짧구나
야속하게도 마지막 기차에는
헤어져야 하는 시간만 실려 와
숙연한 맘으로 태연 하려 했건만
일렁이는 이 연정을 잠재울 순 없었지

경주, 우리에겐 인연의 땅이었다
수양버들 늘어진 역전 분숫가에서
너와 눈 맞춰가며 했던 언약
우리의 만남은 불변하는 영원이라고
서로의 가슴에 섞으며 했던 우리만의 약속
차창 밖 달빛에서 나는 네게 머물러있다
안녕!

경주를 떠나며
1964. 7. 21.
***

여행 엽서 · 2

선!
바다 냄새와 파도소리,
별이 쏟아지는 밤에 취하여
밤 깊도록 모래를 밟으면서도
내 눈에 담긴 너의 얼굴
너에게 여름밤 별 편지를 띄운다
아직도 네 곁에 있는 것 같은
이 마음, 그게 무언지 말해다오

파도에 밀려오며 울부짖는 바다
검은 모래알, 내 맘에 쏟아내는 몸부림
시간은 밤에 잠겨 흐르지 않고
은하수에 맞춰진 모래시계는
내일을 잊고 파도에 스며가고 있다
꿈길에선 우리의 시간이 돌려지리라
한 아름 별을 따서 네게 보낸다
안녕!

제주, 별밤 바닷가에서
1964. 7. 26.
***


여행 엽서 · 3

선!
젊음이 작열하는 이 해변에서
해를 품은 바다는 열기를 식힐 듯
흰 거품 일으키며 밀려왔다 사그라지누나
모래 위에 남겨진 발자국마저도 삼키며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고
거기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텐데

저녁놀 등에 지고 여길 떠난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애조롭게 흐느낀다
그러나 내 마음은 네 곁, 경주에 머물러있다
너는 듣고 있느냐
기적(汽笛)에 실려 보내는 내 마음을
우리에겐 내일이 여물고 있다
안녕!

해운대 해변에서
1964. 8. 1.
***

2) 개인 서신

한숭홍 씨 귀하

초면에 실례하겠습니다.
여러 번 기숙사로 면회 가니 부재중이라서
이렇게 지면을 빌려 전하겠습니다.
다름 아니오라 경주역에 근무하고 계시는 박선자 양의 부탁입니다.
박양께서 요번 10월 20일 인천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모양입니다.
연락이 잘 안 된다면서 부탁한 것입니다.
허락되시면 서울역에 철도 전화로나…
서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주소는 경주역 통신분소 내 박선자.
박 양의 근무 일자는 24, 26, 28, 30日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짝숫날 근무겠죠.
무척 기다리는 모양이 오니 연락하시길 바라오며. 그럼.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1965. 9. 22.
박선자 부탁받고

※ 내가 이 편지를 받은 건 겨울 방학 즈음이었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선자 양이 결혼 청첩장도 분명히 보냈을 텐데 내겐 전달되지 않았다. 당시 기숙사에선 사생들이 돌아가며 우편물을 분류해 전해주었는데, 가끔 여자에게서 온 꽃 편지는 분실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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