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16)
시간에서 공간으로(16)
  • 한숭홍(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2.08.2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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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8월 16일 여행기(1-4쪽)
8월 16일 여행기(1-4쪽)

8월 16일 월, 맑음/ 청곡사

호국·충절의 고장, 진주

  아침 8시에 청곡사(靑谷寺) 입구 갈전리 가는 차를 놓쳐버려 12시 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4시간 동안 어제 미처 보지 못한 명소 몇 군데를 더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자위(自慰)하며 발길을 돌렸다.
  몇 사람에게 물어 호국사(護國寺)를 찾아 올라가고 있었는데,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세워져 있는 V자형의 석탑이 발길을 잡는다. 가까이 다가가 설명문을 읽어보니 한국전쟁 전승을 기념하여 새운 탑이라고 쓰여있다.

  배수장을 지나 한 굽이돌아 올라가면 제일 먼저 서장대가 눈에 들어온다. 말없이 꾸벅꾸벅 올라오다 이곳에 이르렀는데 강바람이 내 품속으로 스며들어 더위를 식혀준다. 눈을 북쪽으로 돌리니 멀리 구름 속에 지리산 봉우리가 아련히 나타난다.

  여기저기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영감님 한 분이 다가와 이곳에 관한 내력을 들려준다. 마산서 왔다는 아주머니 두어 명도 우리와 합류하여 설명을 듣고 영감님의 안내를 따라 창렬사(彰烈祠)로 갔다. 새로 단장한 사당에는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하여 서예원, 최경회, 김천일, 황진 등등 순국열사 39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祭香)한다고 한다.
  창렬사를 나와 호국사에 들리니 절의 내력에 관한 기록이 눈에 띈다. 고려 때 창건한 사찰로서 본래는 내성사(內城寺)라 하여오다가 임진왜란 때 병사들이 머물며 나라를 수호했다고 하여 호국사란 이름을 내렸다는 것이다.
  마침 대웅전 양 기둥에는 결혼식을 하려는 신랑, 신부의 이름이 붙어있어 절에서 올리는 결혼예식 절차를 구경하려 했으나 시간이 없어 문을 나서는데 신부가 면사포에 가려진 채 부축되어 들어온다.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산성을 타고 한참을 돌아가니 영남포정사문루(嶺南布政司門樓)가 앞을 가린다. 노인네 몇 분이 환담으로 더위를 보내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가게 앞 넓은 마루에 걸터앉아 더위에 수고하신 영감님께 막걸리를 받아 대접하니 옆에서는 마산 아주머니들이 시조를 읊으며 흥을 돋운다.

청천에 밝은 달은
청강수에 비치오나
달은 실로 온데 없고
물은 실로 간데 없네

강수가 청천 고로
밝은 달이 나타나니
물에 친탁 타기 열정(?)
달그림자 없어졌네


월아산청곡사 일주문을 넘어

  12시에 갈전(葛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점심을 걸렀더니 허기와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오고, 무더위로 몸도 처졌으나 달리는 차의 창문을 통해 물씬 풍겨오는 향토 냄새를 맡으니 고향으로 가는 것 같은 정취에 취해간다. 차가 1시간가량 달릴 즈음에 잠이 쏟아져 잠깐 눈을 붙였었는데 깨어보니 갈전을 1km 정도 지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약 5km를 산속으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곳곳에 몇 채씩 농가가 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간간이 오가기도 한다. 마을 입구에 도달해 보니 청송이 늘어지고 넓은 초원이 펼쳐있다. 길가로 흐르는 개울에서는 동네 개구쟁이들이 물장난을 치며 놀고 있다. 나무 그늘 밑에서는 학생들이 앉아 쉬기도 하고 더러는 공놀이를 하며 떠들썩하다. 저 구석에서는 황소 한 마리가 나무에 매인 채 풀을 씹으니 평화로운 자연이다. 잔디에 누워 휴식을 취하니 움직이고 싶지 않다.
  느지막한 오후, 저녁녘 즈음에 청곡사 앞에 이르렀는데, 어디를 둘러보아도 적막강산이다. 노니는 새들과 계곡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자연의 침묵을 깨뜨리고 있다.
  숲을 벗어나니 연못이 이끼 낀 물빛을 하고 뽀얗게 고여있다. 나무가 무성한데 그림자가 물에 비쳐 흔들리고 있다. 그 옆을 끼고 쉬엄쉬엄 올라가다 연못을 벗어나니 수량이 적은 개울에는 돌만 쌓여 있고, 그곳에서 성속(聖俗)의 경계 다리를 건너니 ‘월아산청곡사(月牙山靑谷寺)’라는 현판이 일주문에 가로 걸려있다. 청학(靑鶴)이 날아올라 서기(瑞氣)가 충만하다는 절, 이곳이 청곡사다.

  청곡사는 1,100여 년의 오랜 역사가 쌓여 있는 고찰로서 조계종에 속하는 사찰이라고 한다. 세월의 흔적인가. 지금은 단청이 모두 퇴색되고 벗겨져 기둥이며 석가래 받침 목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대웅전 법당 앞에는 꽃나무가 몇 포기 있고 돌층계를 올라서 법당 안에 들어가니 금빛 불상이 진열장에 들어있는 듯 유리로 된 큰 상자 속에 모셔져 있다.
  이 절은 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속세를 벗어난 듯 경건함과 적막한 신비감이 온몸을 감싸며 음습해 오는 묘한 곳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풍경 소리는 세파에 적셔진 내게 나 자신을 돌아보라는 낭랑한 가르침으로 깨우고 있다.
  경내를 둘러보고 뒤편 마루 한구석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노승 한 분이 지나가고 나서 잠시 후에 목탁 치는 소리와 함께 염불 외는 소리가 적막을 깨며 산사에 퍼진다.

여행 중엔 우연도 행운이다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오는 마루에서 일기를 쓰다 그만 잠깐 잠이 들었는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 깨어보니 관광객인 듯한 장년 대여섯 명이 올라온다. 늦저녁, 이 깊은 산에 5km나 걸어오지는 않았을 테고. 저들은 차를 타고 온 듯하다고 김 목사님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러면 차를 좀 태워주지 않겠느냐면서 그들 중의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러 가겠다는 것이다. 사실 땡볕에 두어 시간을 걸어 올라온 우리는 완전히 지치고 힘이 빠져 할 수 없이 내일 아침에 내려가려 했으나 차가 있다면 그만큼 여정을 단축할 수 있어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었다.
  소형 짐차 뒤꽁무니에 앉아 덜컹덜컹 엉덩방아를 찌어가며 내려오는데도 기분은 대단히 좋았다. 이들은 근처의 농산물 작황 검사를 마치고 절 구경을 하러 올라왔다며 문산읍(文山邑)에 볼일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진주 버스정류장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여 달려갔으나 단선 도로에서 트럭 한 대가 고장이나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문산에서는 이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운전사 아저씨는 지나가는 차를 세워 우리를 다른 운전사에게 소개해 주고는 문산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트럭으로 갈아타고 한 시간 가까이 달려 진주에 들어서니 남강 다리에는 가로등이 줄지어 있고 촉석루에는 라이트를 비추어 찬란하게 보였다. 진주의 하늘 아래서 또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196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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