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18)
시간에서 공간으로(18)
  • 한숭홍 (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2.09.04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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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8월 18일 여행기(1-6쪽)
8월 18일 여행기(1-6쪽)

8월 18일 수, 맑음/ 목포-흑산도

다도해 섬 사이를 벗어나 흑산도로

  목포와 제주도를 오가는 여객선 두 척 중에, 가야호는 어제저녁에 떠났고, 오늘은 작은 배로 가야 하는데 롤링과 피칭이 심해 몹시 괴롭다며 주인아주머니가 자세히 알려준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여정을 바꾸어 먼저 흑산도(黑山島)와 홍도(紅島)를 구경하고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식당을 나와 여객선 매표소에 들려 흑산도행 출항시간을 물으니 9시란다. 부산호(500톤)로 8시간을 가야 한다고 하니 한나절을 배에서 보내야 할 판이다.

  배에 오르니 많은 사람으로 선내가 몹시 붐빈다. 더러는 짐짝에 앉거나 갑판 위에 서서 가기도 하고 더러는 선실 바닥에 누워 눈을 붙이고 있다. 고동을 울리며 배가 목포항을 미끄러져 나오는데, 전마선이며 고깃배들이 크게 출렁인다.
  배가 항구를 벗어나 흑산도로 가는 동안 좌우 사방을 둘러보니,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에워져 있어 호수를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간혹 들기도 한다.
  배가 섬과 섬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도서지방에 대한 환상은 낭만적이고 문학적이던 데서 점점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양태로 뒤바뀌어간다. 무인도가 아닌 섬마다 농가가 몇 채씩 눈에 띈다. 비교적 큰 섬에는 농가 여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밭이랑도 눈에 띄니 섬이라는 지리적 특색 이외에는 산촌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오후 두 시가 지나면서 바다가 훤히 트였다. 배가 크게 움직여 멀미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구토를 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 통일교 광신도

  선실에서 사람을 웃기며 요술을 부리던 약장수는 어디론가 가고 기관 소리와 물결치는 소리만 리듬을 타고 내 귓전을 울린다. 내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뱃길이 지루한데 이야기나 하며 가자고 말을 붙인다.

  이번 여행 중에 화가도 만났고, 발랄하고 순수한 대학생들. 사찰 명소를 해설해주던 스님, 느닷없이 밤에 찾아간 뜨내기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내주며 식사도 차려주던 농가의 아주머니, 무더윈데도 진주성 곳곳을 안내해주며 역사해설까지 곁들여 들려주던 어르신 등등 곳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나에게는 여행 중에 얻는 큰 수확이었다.
  나는 이 남자분도 이곳 바다나 지역, 혹은 문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월남한 실향민이며 평안도 신의주가 자기 고향이라고 신분을 밝히곤, 지금 수산 관련 일로 흑산도에 간단다.
  그러더니 내게 대뜸 기독교인이냐고 물어 그렇다고 했더니,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죽으로 왔느냐 살려왔느냐”라고 질문한다. 나는 이 사람이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인류의 원죄, 타락한 상태의 회복을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고 하니 죽으러 왔느냐 살려왔느냐며 심문하듯 다그쳐 묻는다.
  죽기까지 인류를 사랑했으니 결국 죽으러 왔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설명하니, 그렇다며 예수를 잡아 죽게 한 가룟 유다는 금메달을 주어 보상하여야 할 텐데 예수께서는 “그가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저주하지 않았느냐며, 현대 신학자 놈들이 이 문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명할 수 있었다면 세계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라며 말끝마다 욕지거리다.
  나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가벼운 마음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 사람의 상스러운 말투와 혈기를 보며 이럴 분위기가 아닌데 라는 생각을 했다.
  행위시대가 어떻고, 예수 시대가 어떻고 한참 장설(長舌)을 풀면서 수수작용(授受作用)이 가장 이치에 맞지 않느냐는 등 점점 기이한 용어와 궤변을 늘어놓으며 나를 함정으로 몰아넣으려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음과 양으로 되어있지 않느냐는 등 억설(臆說)이다. 박해란 위대한 신앙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있었지만, 결국 신앙이 승리하지 않았느냐며 통일교 같은 신흥 종교를 장로교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통일교 교리의 모순점 몇 가지를 들춰가며 비판한 후에, 정통 기독교에서는 통일교를 이단 중의 이단으로, 반사회적 사교(邪敎) 집단으로 간주한다며 그의 궤변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통일교 신자였다. 신자일 뿐만 아니라 중책을 맡은 열렬한 광신도인듯하다. 혈기를 부리며 나를 설득하러 열심히 궤변을 늘어놓았으나 결국 통일교 교리에 관해 내가 던진 유도 신문에 걸려들어 꼬리를 내리고 배가 선착장에 닿자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여름의 흑산도, 바람결에 묻혀온 숱한 꽃잎

  오후 5시가 되어 배가 흑산도 예리(曳里)에 도착했다. 흑산도는 한 면으로서 홍도, 장도(長島) 등 여러 도서로 이루어져 있다.
  예리 앞바다에는 닻을 내린 고기잡이배 십여 척이 정박해 있었고, 그 사이로는 전마선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하선하자마자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어느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초가집 기둥이나 벽에 서울관, 청춘관, 목포관 등과 같은 간판들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아마 20여 개는 됨직한데, 이곳을 여관으로 알고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물으니 술집이라며 우리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야한 차림의 색시들이 마루나 평상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오가는 사람에게 계속 추파를 던진다.
  목포에서처럼 이곳에도 많은 술집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화장을 짙게 하고 야하게 옷을 입은 색시는 거의 술집 여자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고 한다. 색시들 가운데는 이곳 아가씨들도 있고 고기철을 맞아 목포, 광주, 서울 등지에서 원정 온 아가씨들도 있단다. 이곳은 7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파시(波市)로서 고깃배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기 때문에 이런 여자들이 고깃배를 따라 유동한다고 한다.
  길 복판에서는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돈을 걸고 윷놀이를 하는데, 두 군데나 눈에 띈다. 한판에 100원에서 몇천 원 걸고 내기를 하기도 한다. 고깃배들이 모여드는 철에는 어김없이 도박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단다.
  술과 색시들과 도박꾼들이 들끓는 바닷가, 이런 곳이 고기잡이에 지친 몸을 풀기 위한 어부들의 안식처 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어촌의 생활상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좀 한적한 곳에 있는 민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물어물어 가며 어렵게 찾아낸 집이었다. 배에서 시달리고 여행으로 심신이 피곤하여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려고 하는데, 인근에서 예배당 종소리가 울려온다. 수요예배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찾아 올라가니 「대한예수교장로회 흑산 예리교회」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루에 남자 3명 여자 1명이 앉아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예배를 마칠 때는 20여 명이 모였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에게 인사하니 어디서 왔느냐며 반긴다. 내일 이곳 목사관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어느 어촌에서나 그렇듯이 밤의 바다 풍경은 해무로 덮여 어슴푸레하고, 뱃전의 불빛만 파도에 출렁이며 반짝거린다. 교회를 나와 숙소로 내려오는데 바닷바람이 상쾌하게 스며온다.
  골목 어귀 어느 곳에서 아가씨들의 노랫소리가 밤공기를 흔들며 밤새껏 흘러나오고 있다. 이젠 그만 자야 한다. (196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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