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19)
시간에서 공간으로(19)
  • 한숭홍 (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2.09.0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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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홍도 앞바다에 솟아있는 바위들
홍도 앞바다에 솟아있는 바위들

8월 19일 목, 맑음/ 흑산도-예리-진리-장도-홍도

진리에서 만난 서양 신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홍도(紅島)로 떠나는 배편을 알아보기 위해 주인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선착장으로 가는데, 어떤 젊은이가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어제 홍도에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자기도 서울에서 와서 관광차 홍도에 가려고 하는데 마침 거기로 가는 조그마한 기계 배가 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다.
  흑산도와 홍도를 오가는 정기선은 없고, 목포에서 예리(曳里)를 들려 홍도까지 오가는 배가 한 주일에 한 차례씩 있는데 다음 주에 들어온다고 한다. 여정이 바빠 전마선이라도 타고 가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는 갈 수 없다고 한다.
  홍도에 가기 위해 여기에서 다음 주까지 기다리느냐, 여행일정이 촉박하니 홍도 관광은 여기에서 접고 목포로 되돌아가 제주도를 일주하고 상경하느냐, 이런저런 생각 중이었는데 홍도로 가는 배편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젊은이의 제안에 얽혔던 매듭이 한순간에 풀리는 기분이다.

  아침 7시 40분 배가 출항했다. 곧이어 배에서는 밥을 짓고 싱싱한 회를 치며 아침 준비를 하는데, 동행한 사람이 술병을 꺼내니 술판이 벌어져 너 한잔 나 한잔 신이 났다. 우리는 동석하지 않고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경관을 구경하며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저들은 우리에게 회라도 먹으라며 여러 번 권한다.
  나는 배가 출렁이며 항해하는 동안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여행할 수 있도록 지켜주신 주님께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배는 예리를 떠나 진리(鎭里)에 들려 짐을 싣곤 약속한 여객을 기다리며 두 시간 정도를 머물러 있었다.

  진리에는 지붕을 홍색으로 이은 개신교 예배당(성결교회)과 청색으로 이은 천주교 성당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천주교는 신자들에게 밀가루를 무상으로 나눠주며 교인을 관리하고 있었다. 오늘도 밀가루 18포대를 섬 몇 군데에 실어 보내려 성당 관계자들이 선창에 나와 있었다. 신자인듯한 부인 여러 명이 밀가루 포대를 이고 나와 배에 싣는다.

  야산 자락에 올라 섬 주변 바다를 굽어보니 크고 작은 섬들이 흩뿌려놓은 듯 원근해에 널려있다.
  천주교에서 세운 성모중학교를 둘러보고 있는데, 서양 신부 한 분이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 처음 왔느냐 등등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흑산면에 거주하는 신자 수를 물으니, 1,900명이란다. 신부는 묻지도 않았는데, 앞바다에 정박에 있는 하얀 배를 가리키며 자기네 기계 배라고 자랑이 자자하다.
  성모중학교는 3학급으로 교무실이 옆에 붙어있었다. 방학으로 학교가 비어 고적한데 교사인듯한 젊은이 두어 명이 탁구 시합을 하며 떠들썩하다.

  소형 동력장치를 붙인 거룻배에 14명이 타고 짐도 많이 실었으니 배가 물살을 가르며 나가는 게 힘겨워 보인다. 읍동(邑洞)에 들렸을 때 세 사람이 내리고 밀가루 몇 포대도 내려놓고, 장도(長島)에서도 여러 사람이 밀가루 포대를 하나씩 들고 내리니 하중이 가벼워진 배가 파도를 타고 섬 사이를 힘차게 벗어난다.

8월 19일 여행기(1-4쪽)
8월 19일 여행기(1-4쪽)

청옥색 망망대해를 가르는 통통배

  배가 완전히 섬을 벗어나니 망망대해 서해는 청옥색이다. 배는 나침판의 방향 침을 따라 물결을 가르며 나간다. 조그마한 스크루가 이 배의 원동력이다. 염분 습기를 묻혀 오는 바닷바람은 상큼하리만큼 신선하고, 8월 한더위에 내리쬐는 햇볕은 젊음의 정열만큼이다 뜨겁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은빛 고기들이 물 위로 뛰어올랐다 잠기곤 하며 물놀이하고 갈매기 떼가 하늘을 휘저으며 오르내린다.
  배는 한 시간이 넘도록 통통거리며 항해를 계속했다. 멀리에 검은 점처럼 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해녀들이다. 해무에 덮여 돌섬 몇 개가 아련하게 보인다. 저곳이 홍도라며 사공 영감이 씩 웃는다. 영감은 밀짚모자를 이마 위로 치켜 쓰고 싱글거리거나 껄껄대며 낙천적이다. 올해 55살인데 홍도에서만 33년을 보냈다며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배가 섬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그 윤곽이 차차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섬 주변에는 홍갈색 바위들이 바다에서 솟아난 듯, 바다 위에 떠 있는 듯 흩어져 있다. 울창한 숲으로 에워 쌓인 붉은 바위 섬, 이곳이 바로 홍도!
  배가 물가로 접안 하는 동안 나는 좌우를 번갈아 보며 주변 경관에 할 말을 잃었다. 바닷속을 들여다보니 햇빛을 받은 물결이 출렁이는 대로 빛 무늬가 춤을 춘다. 바닷속 모래에 널려있는 조그마한 자갈들, 치어들의 움직임 등을 보며 커다란 어항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이 청정 바다의 신비, 그 신성함을 경탄치 않을 수 있으랴.

  배에서 내려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조그마한 배 대여섯 척이 들어온다. 한 배에 십여 명씩 해녀가 타고 있다. 배에는 우뭇가사리가 가득 실려 있었고, 해녀들의 망사리에도 모두 우뭇가사리뿐이다. 왜 우뭇가사리만 따느냐고 물었더니 이것이 다른 해초나 해산물보다 비싸게 팔리기 때문이란다. 우뭇가사리 한 근에 80원에서 100원씩 받으며 일본에 수출하는데, 이것이 홍도의 주요 수입원이란다. 동해 북단 대진항에서 갓 잡아 온 생오징어 20마리 한 두름이 100원이니 다른 해산물을 채취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사공 영감 고모님 댁에 여장을 풀고

  사공 영감이 우리 세 명을 고모님 댁으로 데려가 귀한 손님들이라고 소개하며 유숙을 부탁하여 이곳에서 숙소 찾는 어려움을 덜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홍도엔 여관은 물론 여인숙조차 없었다고 하니 영감님의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이 깊어진다.
  이 집은 이 섬에 있는 다른 집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비교적 생활이 괜찮은 듯하다. 마당에 들어서니 가마니에 널려있는 우뭇가사리에서 물이 흘러 땅을 적시고 있고, 마루에 놓여 있는 라디오에서는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방안에서는 젊은 여자가 옷을 여미고 있다. 머리는 젖어 있었다. 방금 우뭇가사리를 따온 해녀였다.
  주인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마당을 둘러보며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이 마을 한 곳에 조그마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바닷가엔 폐선인듯한 작은 배 몇 척이 모래 위에 얹혀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 안에서 놀고 있다. 바다에는 붉은 돌섬 여러 개가 여기저기 솟아있고 구멍이 뚫려 있어 동굴처럼 보이는 바위도 있다.
  몸을 씻고 방안에 누우니 긴장이 풀리며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파도 소리는 서글픔과 외로움이 뒤섞인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 행복감과 서글픈 외로움, 서로 뒤엉켜 엄습해오는 이 감상적인 신비감, 이런 게 외진 낙도에 첫발을 내디딘 내게 잔잔히 흘러들었다. (1965.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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