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서 공간으로(20-2)
시간에서 공간으로(20-2)
  • 한숭홍 (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2.09.11 1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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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여름의 열기 속으로
1) 홍도 등대(1965.8.25)  2) 등대 위에서(왼쪽부터 김 목사님, 필자, 동행한 관광객)
1) 홍도 등대(1965.8.25) 2) 등대 위에서(왼쪽부터 김 목사님, 필자, 동행한 관광객)

8월 20일 금, 맑음-태풍/ 홍도를 일주하며

격랑을 헤쳐가며 공포 속 홍도 일주 

  아침을 물리고 났는데, 사공 영감이 인사하러 찾아왔다. 인사를 마치고는 어제 탔던 배가 홍도 2구에 짐 싣고 가는데 홍도를 일주하며 구경하려면 같이 가자는 것이다.
  배가 통통거리며 홍도 동편 앞바다를 지나가는데, 아침 햇살이 섬에 비추어 빨간 석벽이며 돌산의 명암이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다.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하얀 물안개를 흩날리다 사그라들고, 다시 밀려와 바위를 기어오를 듯 부딪치고 부서지기를 되돌이한다. 치솟은 층암절벽(層巖絶壁) 위에 몇 포기 풀이 나기도 하고 암석 기둥과 같은 기암의 흑석들 사이 계곡으로는 가파른 경사지에 숲이 무성하다. 이곳에 누가, 어떻게 첫발을 들어 놓게 되었을까. 얼핏 이런 생각을 하며 내심 경탄을 금치 못했다.
  어떤 암석은 높이가 5, 60m는 족히 됨직 한데, 그 밑에 10여m씩 되는 천연 굴이 여러 개 있다. 곳곳에 솟아있는 바위와 바위 사이 틈새로는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아련히 보이기도 하니 지상에서 이보다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이 세상에 이렇게 기기묘묘하고 장관을 이른 절경지, 붉은 돌섬이 또 어디 있으랴.
  그뿐이랴 어떤 곳은 집채 같은 암석들을 층층이 쌓아 올려놓은 듯 포개져 있다.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암석을 좌우에서 붙잡아 두기라도 하려는 듯 배배 뒤틀린 소나무 몇 그루가 그 곁에 뿌리를 내리고 불안하게 버티고 서있다. 나는 이 한 폭의 그림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섬 둘레가 온통 기암절벽이다. 뾰족하기도 하고 펑퍼짐하기도 하며 불쑥 튀어나왔는가 하면 동굴처럼 커다란 구멍이 있는 바위들도 있다.

  바람이 점점 더 거세게 몰아친다. 발동이 몇 번씩 꺼졌다 걸리기를 반복하며 배가 2구 바닷가까지 왔으나 거친 파도로 접안할 수 없었다. 사공 영감은 배가 바위에 부딪히지 않도록 긴장대로 밀어내며 온 힘을 다 쏟고 있었다. 싣고 온 짐은 못 부리고 승객 3명만 뛰어내렸다. 검은 구름은 암석과 수림을 회색빛으로 덮으며 밀려오 있다. 흩어져 있는 돌섬들은 짙은 운무로 멀리 있는 듯 아스라이 보인다.
  지난밤에 태풍 주의보를 들었으나 그만 깜박 잊어버리고 배를 탄 게 잘못이었다. 나는 이 와중에도 기암절벽과 층층이 쌓인 암석들을 힐끔힐끔 곁눈질해 보곤 했다. 이 별스러움을 역마살이 붙은 광기라고 해야 하나 괴기라고 해야 하나.

8월 20일 여행기(1-7쪽)
8월 20일 여행기(1-7쪽)

  거칠게 쏟아붓는 빗물과 뱃머리로 넘쳐 들어오는 바닷물이 배 바닥에서 출렁인다. 우리는 밀가루 포대를 옮겨 놓으며, 너나없이 모두 물을 퍼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공 영감은 키로 배를 조정하며, 다급한 목소리로 지시한다. 거센 풍랑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배 바닥에 고여가는 물은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지 않는다.
  본래 이 배는 칠팔 명 정도 탈 수 있는 노 젓는 배였는데 여기에 작은 발동기를 달아 기계 배로 개조한 것이므로 발동이 꺼지면 노를 저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런 상황에서 노를 저어가며 격랑을 헤쳐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의 손길이 뻗쳐오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공포, 이젠 너나없이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발동이 자주 꺼지는 것도 공포심과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영감님은 발동을 걸려고 발동기 줄을 계속해서 당긴다. 그러기를 수십 번, 마침내 발동이 걸렸다. 배가 파도 위를 오르내리며 몇십 분을 달려 홍도 1구 해안으로 접안해 가는 순간, 너나없이 모두 넋이 나간 듯 말이 없었다. 배가 섬에 다가가자 바닷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든다. 나는 잊히지 않는 추억의 공포도 여행의 한 과정으로 일기에 적어놓았다. (1965.8.20.)
                            ****          
  오늘(8월 25일) 홍도를 떠나는 날이다. 한 주일 동안 많은 추억을 새겼던 아름다운 섬, 언젠가 다시 오리라! 우리는 주인 할머니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배에 올랐다. 배가 홍도 2구에서 한두 시간가량 머문다기에 이 기회에 홍도 등대에 가보기로 했다. 산등성이에 높이 세워져 있는 등대 위에서 섬과 주변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다. 바닷가에서나 배를 타고 가며 보던 섬의 경관과는 다르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경, 내 가슴에 새로운 느낌으로 와닿는다. (1965.8.25.)

[알리는 말씀] 8월 21일(토)~25일(수)까지 기록한 여행 노트를 분실하여 이 기간의 여행기가 없습니다. 섬을 출발하는 8월 25일 짧은 기록은 기억을 되새겨가며 적은 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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