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양심, 신앙적 양심
도덕적 양심, 신앙적 양심
  • cwmonitor
  • 승인 2004.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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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관 부장

나는 고백한다. 그대는 곧은 양심을 지녔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음을. 나는 고백한다. 양심에 꺼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몸부림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나약한 몸뚱이가 매일 지쳐 비틀거려도 선의의 편에서 지탱하고자 하는 애씀이 있었음도.

나는 양편에서 흔들리는 나를 발견한다. 결실을 맺게 한 가을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평가하게 한다. 난, 과연 ‘양심’이라는 명제 앞에 옳은 소리를 내뱉고 큰소리 칠만한 자격을 갖췄는가 묻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싸움판이 펼쳐졌다. 한쪽에선 누가 누구를 심판하느냐고 원성을 높인다. 큰 소리 치는 쪽이 우세처럼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세 등등한 목소리는 차츰 힘을 잃어간다. 대꾸도 없다. 논할 가치도 못된다며 아예 무시한다. 구경온 사람들이 묻는다. 누가 잘못했냐고, 아니 누가 잘못 됐냐고. “글쎄요, 상대편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니 뭐라 답할 수 없는 안타까움만 있네요”

한국교회 대표기관에서 중책을 맡은 한 목회자의 ‘학력의혹’ 보도기사가 나간지 2주가 지났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사자나 기관 입장에서 여지껏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발표하나가 없다. 시간이 갈수록 독자의 성화는 거세 진다. 뚜렷한 답변을 줄 수 없는 본사를 향해 ‘오보’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보내기도 한다. 왜 옳고 그름을 속 시원하게 밝혀줄 수 없을까. 허무맹랑한 얘기라서 그럴까. 아니면 너무나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져 엄두가 나지 않아 그럴까.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지는 문제가 결코 아닐진대, 왜 이 문제로 끙끙 앓는지 모를 일이다.

한국교회와 독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텐데도 왜 모르쇠 고집만 붙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항간에 들려오는 소리는 법정 대응을 불사하겠다는 소문뿐이다.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기관으로서 옳지 않은 처사다. 이 곳은 일반 사회기관이 아니다. 개개인이 만든 사유기관이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실천을 표방한 기독기관이다. 도덕적인 양심을 넘어서 신앙적 양심에서도 한점의 의혹이나 미심쩍은 부분이 없어야 하는 종교기관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주인되시고 한국교회가 주연하는 공기관이다. 이러기에 우리는 한국교회 대표기관에 거는 기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침묵은 양심을 가리는 행위로 치부할 수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일상사에서 옳은 양심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한번 속이면 두 번 속이기는 결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뜨리는 힘은 쉽게 만들어진다. 이에 발맞춰 양심의 반응속도는 느려진다. 둔감하다 못해 석화로 굳어지기도 한다. 이러다보면 어떤 경우든 딱딱해진 양심을 향해 아무리 호소해도 ‘소귀에 경 읽기’식이 된다.
한국교회의 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단 사이비 대책위원회는 매우 중요한 부서이다. 신학적 학식과 소양을 갖춘, 신앙적으로도 건전한 양식을 갖춘 목회자가 나서서 해야 할 중요한 자리이다. 정규학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학력과 관계없이 신학적 신앙적인 검증을 거치거나 복음의 열정을 갖고도 충분히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 할 수 없는 일은 거짓으로 둔갑한 채 그에 걸맞는 명분을 만들어 위세를 떨친다는 사실이다. 솔직하게 드러내 놓고 따진다면 누가 누구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바로 사실을 숨기고 거짓을 진짜인 양 포장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속인 사람이 어느 교단 어느 단체가 이단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게 독자들의 성화다. 판별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다 해도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결코 신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일은 조용하게 묻혀 갈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독자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하루 빨리 뚜렷한 답변이나 공식입장을 고대하면서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자복하고 회개하는 행위는 어제의 나를 묻지 않는다. 달라진 오늘의 나에게 큰 관심을 둔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래서 매력이 있다. 기독교의 사랑은 죄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나를 그대로 내려놓고, 나 자신을 부인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체면 따위에 얽매어 부리는 고집은 종국에는 지탄의 대상이 될 뿐이다.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다. 사실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해서 그 일에 대하여 행여 과오가 있다면 용서를 먼저 구하는 용기있는 행위가 찬사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된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이러한 토대 위에서의 양심적 행위가 만사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jjk6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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