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튀빙겐의 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0년 튀빙겐의 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勁草 한숭홍 (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 승인 2023.12.0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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勁草 한숭홍 (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勁草 한숭홍 (장신대 명예교수, 시인)

 

 

 

 

 

 

 

1970년 4월 16일, 날씨는 화창하고 상쾌했다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여름학기가 시작되어
도시 전체가 붐비는 학생들로 생동감이 넘쳤다
4만 5천 명 중의 1만 5천 명이 대학생이니
도시가 대학 캠퍼스 같은 특수 공간인 셈이다
 
머리를 지식으로 채우겠다고 모인 젊은이들
그러나 육신은 본능의 욕구를 물리칠 수 없었다
정오가 되어오며 밀물처럼 몰려오는 굶주린 눈동자들
움푹 팬 눈은 서글프고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짝거리는 식판과 식권을 쥐고 줄 맞추어 따라간다
그 틈새에 내 그림자도 묻혀 흘러가고 있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1)고 배웠으나
속인의 뱃속은 공복의 유혹엔 약하다
200㎡ 정도 됨직한 멘자2)는 학생의 가벼운 주머니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1마르크 자유지역이었다

나는 멘자에서 나와 기숙사 앞에 있는
학생 회관 잔디밭에서 커피를 마시며
학과 사무실에서 받은 수강 과목에 관한
안내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다

신문을 읽고 있는 학생들
시사잡지를 넘기며 읽고 있는 학생들
잡담하는 학생들
온갖 군상이 곳곳에 흩어져 오후 한때를 즐기며
여유로움에 시간을 맞추어가고 있었다

빈 의자가 없었기 때문이긴 하지만
어느 여학생이 다가와 앞 의자에 앉으며
인사를 하곤 말을 걸어온다
날씨로 시작된 대화가 수강 과목으로 옮겨질 즈음에
느닷없이 통성명이나 하자며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데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리카르다 라인간쓰(Ricarda Rheingans)라고 한다
그냥 리키(Rici)라는 애칭으로 부르라며
바로 말을 놓고 대화를 이어간다
그녀의 갈색 머리칼은 짧게 다듬어져 있었고
안경 낀 눈의 까만 눈동자는 깊은 호수 같았다
개방적이고 소탈한 것이 그녀의 성품인 듯했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랑이 안쪽에는
시꺼먼 기름으로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위에는 몸에 붙는 주황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떠날 때 보니 자전거를 타고 간다

다음 날 점심을 먹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날은 강의가 없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방에 가서 받은 편지에 답장을 쓰고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자유에 취해보려 했는데
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여서
기숙사 방에 같이 와서 커피를 끓여 마시며
대화로 오후의 자유로움을 게으름으로 즐겼다
그녀는 가족사를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며
저녁이 되어 멘자에 갈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내가 책을 대출하러 도서관에 가거나
서점에 갈 때도 시간을 내어 와서 도와주곤 했다
이러다 보니 점점 만나는 횟수가 자자 졌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자취하는 집에 가자며
가는 길에 장을 좀 봐서
시골길을 사오십 분 정도 걸어갔다
그 집은 널빤지로 된 포도밭 농막이었다는데
포도를 재배했던 밭에는 잡목과 풀만 무성했다
주위가 온통 쓸쓸하고 좀 외로운 듯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이 달랐다
옷가지 몇 개와 전공 서적 10여 권,
선반에 있는 식품 몇 개가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어떤 면에선 말괄량이처럼 보이는 그녀지만  
실상은 퍽 여성적이며 예민할 정도로 감성적이다
문학을 전공하나 문학에 관해 대화한 적은 없다
이런 모든 게 그녀의 개성이며 생활방식인 듯하다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게 채 한 달도 안 되었으나
우리는 너무 빨리 가까워졌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우리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서로 마음을 섞여가며 보듬어 가고 있다
잠깐씩이라도 자주 만나다 보니
그럴 때마다 매 순간이 새롭고 아름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의식과 취향, 사고방식,
문예적 관심 영역 등도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동화되어 가는 이 변화과정까지도 즐겼다

어둡고 삭막한 농막 속에 내 던져졌던 그녀의 고독이
우리의 만남으로 인해 평안을 느끼고 있는지도…
어쨌든 그녀는 매우 적극적으로 내게 밀착했고
그럴수록 내 마음은 푸른 초원을 거닐고 있는 듯
봄 향기와 찬란한 빛 속에서 그녀를 품어주었다

따뜻한 그리움, 밝은 빛, 푸른 하늘, 맑은 호수,
뜨겁게 내몰아 쉬는 야릇한 가쁜 숨소리,
밤마다 꿈속의 현실에 안겨지는 포근한 포옹
이런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그녀의 깊은 속마음
어느 때부턴가 그 속에서 희망이 속삭이고 있었다
1970년 튀빙겐의 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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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복음 6:31; 누가복음 12:29.
2) 멘자(Mensa): 독일 대학교 학생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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