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갈 5: 22-23)
제대로 된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가슴 속에서 위와 같은 보배들을 꺼내어 ‘나’를 비추는 거울로 삼는 삶이다. 이 때 내 존재의 영상위에 진리의 빛이 던져지고 감정적 에너지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인류의 대다수는 감정적 에너지에 지배당하고 있다. 주입된 관념과 에고에 둘러싸인 감정에 따라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감정의 밀물과 썰물에 요동치며 살다보니 사실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즉 거짓자아의 합성물에 스스로 속아 살게 된 것이다. 이들은 ‘내 것’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고 영적생명의 핵심인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 성장이 일어 날 수 없다. 생명은 활동이고 변화이다. 변화와 성장은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오랜 종교생활을 해도 의식과 삶에 어떤 진보와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늘 그저 그런 이, 곧 늙은이로 살아가는 오늘의 교회풍토는 무얼 말해주는 것일까?
예수가 말씀한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은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그런 존재, 무가치한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길 잃은 자, 강도 만난 자, 생명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온 자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의 온전함(wholeness)의 수준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 온전함을 성취해야 될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숭고하고 거룩하고 순결한 감각, 보다 아름다운 의식을 주시고자 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있어 지극히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주체(I AM)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신다. 어떤 기대도 없이 강도 만난 자를 구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타인의 곤경이 내 가슴에 촉구하는 소리에 따라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 때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기 도적에게 희생된 자, 상처 입어 피 흘리는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며 쓰러져 있구나. 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리라”
예수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했다.(마12:36) 이 말은 내가 나를 진정으로 위하는 것이 사랑임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자기 존중(Self appreciation)의 감각 안에서 자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돼야만 한다.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이 무한한 가치가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감각과 믿음의 자존감을 지녀야만 한다. 그래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비로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때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을 위해 필요한 자기 사랑이 ‘자기 증오’로 바꿔지게 된다. 오늘 날 현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싸움의 현장에서 우리는 자기 증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 쉽게 확인 할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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