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자 사모의 이야기 세상 <6>
박은자 사모의 이야기 세상 <6>
  • cwmonitor
  • 승인 2006.03.2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 다녀간다

월요일 아침, 늦잠을 잤다. 남편은 노회가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갔고, 나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고, 나를 찾으러 4층까지 올라오지도 않았다. 나는 또 다시 잠속으로 스르르 빠졌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조그만 비닐봉지가 하나 놓여있고, 그 옆에 "아버지 다녀간다" 라는 짧은 글귀가 적힌 종이가 한 장 놓여있었다. 순간 가슴속으로 싸한 통증이 지나갔다.

게으름 피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차 한 잔 나누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놓고 간 작은 비닐봉지 안에는 냉이 삶은 것과 깨끗이 씻은 달래가 한줌 들어 있었다. 필경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동생이 캔 냉이와 달래일 것이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냉이를 캐고 달래를 캤을 동생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도 가슴이 시렸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나물을 다듬었을 모습도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아직은 우리 모두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아니 아물 수 없는 상처다. 아버지는 48년을 함께 살았던 아내를 아무 준비 없이 보냈고, 우리들 칠남매 역시 어머니를 그렇게 보냈다. 어머니가 없는 타격은 어느 자식보다 내가 컸다.

나는 어머니를 잃었고, 또한 우리 예은교회의 권사님을 잃은 것이다. 어머니가, 아니 권사님이 안계시다는 것은 금방 피부에 닿았다. 당장 공동식사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간다. 그 동안은 어머니가 농사지은 것들, 그리고 봄이면 온갖 나물을 해 오셔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점심밥을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마늘 한 쪽도, 파 한 단도, 심지어는 고춧가루까지 다 돈을 주고 사야 하니, 재정부에서 나오는 월 10만원으로 주일마다 40명 가까운 식사를 준비하려니 턱없이 모자라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어머니 윤 권사님은 내가 일하는 것을 말리셨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으면 잠을 자라고 했고, 또 글을 쓰라고 하셨다. 물론 지금은 최순예 권사님이 그 일을 대신 하신다. 최순예 권사님이 어머니처럼 내가 일하는 것을 말리시지만 칠십 중반을 넘으신 권사님이 일하고 계신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사모가 너무 많이 일을 한다고 안쓰러워하시는 최순예 권사님,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하고 계시는 최 권사님 사랑으로 눈물을 닦은 적이 여러 번이다.

개척교회 사모이다 보니, 아니 늘 가난하다 보니 아버지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이 일산에 사시는 친정 고모님 회갑이었다. 친정 식구들과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다. 올라간 길에 아들을 만나고 올 계획까지 세웠다. 그래서 아들이 좋아하는 파김치를 담는 등 이것저것 반찬을 준비했다. 그런데 금요일 날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 돈을 지출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돈이 한 푼도 없게 된 것이다. 밤새도록 고민했다. 그리고 새벽예배가 끝난 다음에도 고민을 했다. 그런데 끝내 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아들에게 가지 못하게 된 것은 물론 고모님 회갑에 축의금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서울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못 간다고 말하자 당장 아버지가 화를 내셨다.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전에 눈물이 주루룩 쏟아졌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사실은 아들에게 가지 못하는 것이 내 마음을 더 상하게 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가져가려고 이것저것 준비해 놓았던 것들을 바라보는데 몹시 마음이 상했고, 아버지 마음을 노엽게 해드린 것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지난 1주일 동안 "아버지께 다녀와야지, 전화라도 드려야지" 하면서 다녀오지도, 전화를 드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가 먼저 다녀가신 것이다. 그저 당신이 다녀간다는 한 줄 글로 당신의 마음을 다 쏟아놓고 가셨다.

혼자가 되셔서 한없이 쓸쓸하고, 한없이 늙어 보이시는 아버지, 내 모습 그대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야 될 텐데 잘 되지가 않는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위안 삼으며 내 할 도리를 미루고 있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그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나는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다.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 잘해드릴 수는 없어도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면 아버지는 작은 교회의 사모 처지를 이해해 주시지 않을까? 아버지가 가져다주신 냉이처럼, 달래처럼, 나도 아버지께 봄나물처럼 향기롭고 봄 햇살처럼 따뜻한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 신관 201-2호
  • 대표전화 : 02-3673-0123
  • 팩스 : 02-3673-01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종권
  • 명칭 : 크리스챤월드리뷰
  • 제호 : 크리스챤월드리뷰
  • 등록번호 : 서울 아 04832
  • 등록일 : 2017-11-11
  • 발행일 : 2017-05-01
  • 발행인 : 임종권
  • 편집인 : 임종권
  • 크리스챤월드리뷰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크리스챤월드리뷰.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