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1950년대 초에서 1970년대 말까지 약 30년 사이에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국어교과서에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을 접했던 소중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지금 50대에서 70대 중반에 걸친 사람들이 아직도 김진섭(金晉燮)이 번역한 독일 시인 안톤 슈낙의 명문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슈낙은 1892년에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 때는 군복무 중에 전쟁에 관한 많은 시를 발표하여 독일의 중요한 전쟁시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차 대전 후 1930년대에는 시와 함께 희곡, 소설, 수필 등으로 작품활동의 장르를 넓혔으나, 1933년에 히틀러에게 충성을 서약한 88인 작가 중의 1사람이 되면서, 나치 협력자라는 어두운 그림자만 남겼을 뿐 그 뒤로는 성공적인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50대임에도 불구하고 1944년에 징집을 받아 참전했다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패전 후 그는 ‘칼 암 마인’이란 고장에 정착하여 작가생활로 복귀했지만 역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1973년 생을 마감했다.
한 마디로 슈낙은 세계문학사에 이름을 남길만 한 대단한 작가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오늘 현재 위키피디아를 방문해 보면 그 이름을 해설항목으로 올려 놓은 곳은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그리고 한국어 4개 언어뿐이다. 또 ‘구글’에 그의 이름 Anton Schnack과 함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원어 제명인 ‘Was traurig macht’를 쳐 넣고 검색 해보면, 동명이인의 엉뚱한 자료를 제외하면 독일어로 된 자료보다 한글자료가 더 많이 뜬다. 왜 이렇게 한국인은 그의 글을 잊지 못할까.
청천(聽川) 김진섭은 1903년에 태어나 1920년 양정고보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호세이(法政)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했다. 호세이대학은 일본에서 외국어, 특히 프랑스문학과 독일어문학의 명문으로 그 나라의 많은 석학들을 배출한 곳이다. 해방 후 1946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 겸 교수가 되었고, 1949년 1월 제2수필집 『생활인의 철학』을 선문사에서 출간했다. 그때 권두작품으로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번역해서 실었는데, 이 책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 그해 7월에 바로 재판을 냈다.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청천은 서울에서 납북이 되었다. 그러나 1953년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이 글이 게재되었고 1982년 교과서가 대폭 개편되어 사라지기까지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숱한 젊은이들을 매료해 왔다. 일반적으로 교과서에 실릴 글은 편수 과정에서 일부 수정이 된다. 이 글도 애초에 한문 투였던 문장이 우리말로 몇 차례에 걸쳐 수정되었지만 첨삭된 구절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청천의 번역에 무리한 의역이 많고, 몇 구절을 임의로 추가하거나 누락시킨 곳이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견해다.
슈낙은 1941년 산문집 『젊은 날의 전설』을 발간하면서 이 글을 권두작품으로 실었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전이 임박했던 1944년에 재판을 내면서 전시 비상시국에 맞지 않는 글이라고 판단했는지 이 작품을 삭제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46년에 『로빈손의 낚시』라는 새로운 이름의 작품집을 내면서 이 작품을 부활시켰다. 한 가지 작품도 작가에 의하여 몇 차례 수정될 수 있다. 청천이 번역한 글은 1941년 『젊은 날의 전설』에 실었던 텍스트였다. 개정된 버전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였다. 지금 우리나라에 원문으로 들어와 읽히고 있는 텍스트는 1946년 개정된 버전이다. 슈낙의 시적 표현은 함축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의역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각의 주장처럼 “흴더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이란 구절이 번역자의 임의로 추가될 수는 없으며, 푸주간을 다룬 긴 문단 하나가 통째로 삭제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슈낙의 작품이 지금 자기 조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격조 높은 청천의 명역 덕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슈낙은 청천의 표기, 현행 표기법으로는 쉬나크가 된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