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장로 정치'
한국의 '장로 정치'
  • 정문재 부국장 겸 경제부장
  • 승인 2013.08.12 1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당수 청와대 참모 60~70대 인사

고대 그리스는 훌륭한 정치학 교과서다. 폴리스(polis)마다 다양한 정치 체제를 발전시켰다. 후대(後代)가 참고할 만한 정치체제는 모두 등장했다. 왕정을 채택한 곳이 있는가 하면 아테네처럼 민주정을 꽃피운 도시국가도 나타났다. 스파르타는 군주정과 과두정의 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스파르타의 정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자신이 강조한 대로 '철인(哲人)통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통치됐다. 플라톤은 "본성적으로 기억력이 좋고, 이해가 빠르고, 도량이 넓고, 우아하며, 진리와 정의와 용기와 절제의 친구인 사람이 교육을 받고 연륜이 깊어져 원숙해진 후 나라를 맡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스파르타에는 두 명의 왕이 있었다. 둘이 권력을 나눠 가졌다. 참주(僭主)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나마 실권도 많지 않았다. 왕보다는 게루시아(Gerousia)가 실세였다. 게루시아는 우리 말로 '장로(長老)회의'나 '원로원'이라는 뜻이다.

게루시아는 모두 30명의 의원으로 구성됐다. 두 명의 왕은 당연직 의원이었다. 나머지 28명은 60세 이상의 귀족 가운데 적임자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을 취했다. 임기는 없었다. 한 번 선출되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기존 의원 가운데 한 명이 사망하면 다른 29명의 의원이 새내기 의원을 선출했다.

게루시아는 최고의 의사결정권을 행사했다. 게루시아는 시민들로 구성된 민회(Apella)에 동의를 구해야 하지만 민회가 의결한 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최고 법원의 역할도 수행했다. 왕이라도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면 게루시아의 기소를 피할 수 없었다. 더욱이 합법 또는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헌법재판소 역할까지 떠맡았다. 스파르타 최고의 권력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의 결정까지 무효화할 권리를 가졌다.

이처럼 막강한 권한은 '장로 정치(gerontocracy)'의 효율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노하우가 노인의 경험과 판단력에 녹아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대표적인 지지자다. 그는 "나이 든 사람들이 통치하고, 젊은이들은 여기에 따르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장로 정치는 고대는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중국이 대표적이다. 지난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덩샤오핑을 비롯한 8명의 원로 지도자들이 중국을 다스렸다. 그 당시에는 "60대 인사들의 은퇴 여부를 결정하는 70대 지도자들의 모임을 80대 원로들이 소집한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될 정도였다.

미국 상원도 나이 많은 의원들이 이끈다. 미국 상원의원 가운데 40대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상임위원장은 대부분 원로들의 몫이다. 스트롬 서먼드(Strom Thurmond) 의원은 2003년 1월 100세의 나이로 사퇴할 때까지 47년간 의정 생활을 성실히 수행했다. 로버트 버드(Robert Byrd) 의원도 1959년부터 2010년 타계할 때까지 의사당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 후보자에 대한 최소 연령 규정도 '장로 정치'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공직 진출을 막는 법은 없다.

최근 청와대 인사로 국내에서도 '장로 정치'가 꽃을 피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 가운데 상당수가 60~70대 인사들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 플라톤이 지적한 대로 이들의 연륜이 나라를 잘 이끌어나가는 자산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국정 운영은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체력적으로 상당히 부담스런 자리라는 얘기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2차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열린 얄타협상 과정에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그 이유는 루스벨트의 체력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반대 주장이나 비판에 귀를 기울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도 나온다. 옛 소련이 변화의 물결을 타지 못한 것은 지도부가 하나같이 고령자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선택은 청와대 참모들의 몫이다. 이들의 노력과 자세 여하에 따라 한국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

참고문헌
1) Kahan, Alan. 2010. MIND vs. MONEY: The War between Intellectuals and Capitalism. New Brunswick: Transaction Publishers.
2)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2013. 국가(Politeia). 숲.
3) Gerontocracy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4) Gerousia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서울=뉴시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 신관 201-2호
  • 대표전화 : 02-3673-0123
  • 팩스 : 02-3673-01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임종권
  • 명칭 : 크리스챤월드리뷰
  • 제호 : 크리스챤월드리뷰
  • 등록번호 : 서울 아 04832
  • 등록일 : 2017-11-11
  • 발행일 : 2017-05-01
  • 발행인 : 임종권
  • 편집인 : 임종권
  • 크리스챤월드리뷰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크리스챤월드리뷰.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