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에 달린 십자가 교회
가시나무에 달린 십자가 교회
  • 이장식박사
  • 승인 2014.12.18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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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식박사
탄자니아의 아루샤라는 도시에 있는 감리교 신학교 학장의 요청으로 나는 한 학기 강의를 맡아 갔었는데 어느 주일날 그를 따라 마사이인들이 사는 광야와 같은 한 사막지대에서 주일날 예배에 설교를 하러 따라간 일이 있었다. 그는 자동차에 나무토막 둘을 못을 붙여 만든 십자가 하나를 싣고 약 한 시간이상 길도 없는 들판 한 가운데에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마사이인 남녀 50여명이 모여서 땅바닥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교회당 건물이 없었다. 단 목사는 가져온 그 십자가를 큰 가시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 그 아래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교회당 건물이 없는 곳에 가시나무에 달린 십자가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것 같이 되었고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돌아올 때는 그 십자가를 떼어 가지고 왔는데 그리고 나니 그곳은 교회흔적은 없는 빈 벌판의 한 지점에 불과했다. 나에게는 그 가시나무에 달린 십자가가 의미 있어 보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가시관을 쓰시고 그 가시에 찔려 피를 흘렸을 것인데 그러한 고통을 견디다가 결국 못에 박히시고 창으로 찔려 피를 쏟고 운명하신 것이다. 그를 매달은 나무는 곧 가시나무였고 그 가시나무로 만든 관으로 쓰시고 조롱받기도 했다. 교회는 모름지기 예수의 십자가가 있는 곳에 있고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빈 들판과 같은 것이니 그것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일 지라도 빈들의 들판과 같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교회는 교파에 따라 또 개교회의 취향에 따라 교회 건축이 각각 다르다. 천주교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육신의 조각이 달린 십자가를 제단 중앙에 세워두고 그곳을 ‘성당’이라고 부른다. 마치 유대인 예루살렘 성당에는 법궤가 ‘회당’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다.
개신교의 교회는 성당이라 부르지 않고 ‘교회’ 곧 교인들이 모이는 회당, 또는 예배드리는 집회소라는 뜻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신교 중에 영국성공회나 루터교회를 제외하고는 교회당에 십자가를 볼 수 없어 마치 텅 빈 공간과 같다.

한국교계에서 분열과 분쟁이 가장 크고 심한 교파는 장로교파들이다. 그러면서 장로교 목사들이나 교인들이 한국에서 장로교가 ‘장자’교회라고 자칭한다. 장자는 힘이 세고 크니 이러한 싸움을 해도 거칠고 손상도 크게 만든다. 교회는 영적으로 보면 장자권 소유의 실패이다. 장자는 한사람이고 부모(하나님)을 잘 모시고 동생들보다 효심이 더 좋아 효도(경전)도 본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에서와 같이 장자권을 스스로 양도하는 셈이 된다.

동생들이 형님으로 존경하고 따르기에는 부족한 사람이 장자가 될 자격이 없다. 개신교 교회당 중에는 크고 화려한 건물이 있으나 세상단체에 그것을 팔아 넘겨도 사는 사람이 그 교회당 건물을 리모델링 할 필요 없이 그냥 쓸 수 있는 건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당다운 특색있는 건축물로 건축된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팔려나가는 교회당 건물이 많다. 예수님이 어디서나 신령한 진리로 예배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말씀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말했을 뿐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 앞으로 무너질 것이라 말씀하시고 우셨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교회를 신자들이 모이는 집회라고 불렀지만 루터교회에는 교회당 안에 십자가가 있고 주일예배 때 목사가 입장하면서 십자가를 앞세우고 예배를 시작한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영국과 청도교의 본을 받아 십자가가 교회당에 있는 것을 ‘우상시’하여 교회 안에 십자가를 없애 버렸다. 그러고 보니 교회가 마사이인들이 들판의 한적한 공간과 같이 되어 버렸다. 십자가가 붙어 있지 않을뿐더러 십자가를 대신 할 수 있는 성만찬 예식도 일 년에 몇 번 할 뿐이다. 그리고 많은 목사들의 설교에서 십자가 언급이나 예수의 이름조차 언급이 없는 설교가 많으니 십자가의 경전은 없어지고, 성경 말씀은 분문으로만 있고 세상이야기와 세상의 책들의 말들로써 설교를 이어가고 교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과 웃게 하는 말을 많이 해서 설교시간에 목사와 교인들이 웃고 좋아 때가 많다. 십자가의 설교를 하려면 ‘죄’ 이야기를 해야 하고 죄 이야기를 하면 ‘회개’ 할 일을 말해야 하고 그리고 자기희생과 겸손과 화목을 설교해야 하는데 그것이 힘들어 보이는 교회가 많다. 이러한 교회는 십자가가 있는 교회가 될 수 없다.

한반도 한국 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다 순교당한 순교자가 많은 땅이다. 옛 이조시대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아 수 없이 많이 순교한 성지가 많다. 개신교도 일제시대에 박해를 받아 순교한 신자들이 많았고, 또 해방 후 북한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무서운 박해를 받고 순교도 하고 교회당이 파괴되거나 문 닫은 곳이 많았고, 또 6.25전쟁으로 수많은 목사와 평신도들이 북한으로 납치되어 가서 죽임을 당하였고 남한에서도 침공해온 공산당원과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어 순교한 신자가 무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북한 땅에서는 교회가 전멸한 상태고 남한에는 교파가 250여개나 있으나 화목과 평화가 없는 교회가 되었으니 가시나무에 달려 순교한 순교자가 많은 한국 땅의 오늘의 교회를 보시는 예수그리스도는 우시고 계실지 모른다. 가사나무에 달린 십자가를 떼어버린 곳에 교회의 흔적이 없어진 마사이인의 들판과 같은 한국 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남은자’를 통하여 교회다운 교회가 살아남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는다. 기독교역사에서 보면 옛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또는 오늘의 중동지역이 한때 기독교가 왕성하여 많은 교회당들과 신자들이 있었는데 사신왕조의 박해와 그 후 이슬람교의 박해를 받아 교회가 멸절하다시피 되었던 때가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남은 교회와 교인들이 있어서 옛날 번성하였던 때의 교회들과 신도들보다 더욱 그리스도인다운 신자들과 교회다운 교회들이 남아있고 지금도 박해 아래서 복음을 살려가고 있다. 이것은 오늘 중국의 공산치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남은 자’역할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모델로 삼은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해줄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정치적 자유나 경제적 경쟁의 자유나 그 어떤 세속적인 자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부당하게 옥에 갇히고 사람을 또는 억눌리거나 착취당하고 있는 가련한 사람들을 풀어주고 구출하는 길은 그들을 가두고 누르고 착취하는 자들이 죄를 뉘우칠 때 그 길이 열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불의와 불행의 뿌리는 뽑히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예수님의 싸움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가나나한 자들을 살아갈 수 있고 그리고 갇힌 자들의 해방을 위한 복음의 정의의 싸움이다. 한국교회의 신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싸움의 전사가 되어 사회의 불의와 악의 뿌리를 뽑는 일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복음의 교훈대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교회의 지성소를 오염시키는 성당마당의 온갖 장자와 돈거래의 장바닥을 정결하게 하는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성전의 보물은 법궤이고 우리교회의 보물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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