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의 가난
성직자의 가난
  • cwmonitor
  • 승인 2001.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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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 용 주교/대한성공회 부산교구장


저는 2대째 성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왜 성직자는 가난해야 하느냐고 아버지께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제 아들도 성직의 길에 올라 있습니다. 평생 가난해야 할 아들을 바라보면서 왠지 그의 장차의 살림살이가 지레 걱정이 되는 것은, 아마도 제가 아직도 성직이 뭔지를 모르는 탓인 것 같습니다.
저는 성직안수를 받은 이래로 많은 설교를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설교를 위해서 많은 성경본문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주님께서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구절을 인용하여, “성직자가 머리 둘 곳(사택)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교를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자급전도자로 살았다고 전하는 말씀, 곧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더라”고 하는 구절을 인용하여 “성직자들은 성도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사례금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설교를 해 본 일도 없습니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라든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하신 세례 요한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직자들은 청빈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교해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저의 설교에서 만약 이 구절들을 언급했다면, 주님께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 사도 바울이 자비량선교사였다, 세례 요한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사는 것이 좋다는 정도의 언급으로 끝나곤 했을 것입니다.
많은 성경 구절들을 샅샅이 살펴, 주석서 들춰가며 어귀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설교를 해 왔는데도, 위에 말한 성경구절들만은 건성으로 지나간 제가 과연 바른 설교자입니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게도 입이 달렸다고 한 말씀 하라면, 지금이야말로 성직자가 청빈을 본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때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아도 성직자는 가난한 것이 긍지입니다.
남들이 모두 다 제 가진 것을 자랑으로 여기더라도, 성직자만은 청빈을 자랑으로 삼아야 합니다. 더구나 90년대 후반기부터 온 국민이 가난의 훈련을 다시 받고 있는 터에, 사람들에게 물질의 축복을 빌어 줄 수 있기 위해서 성직자가 먼저 물질적으로 넉넉해야 한다는 거짓예언자들의 논리를 스스로에게 적용해서야 되겠습니까?

군대를 나가도 성직자에게는 군종이 되게 하여 총을 메우지 않는 뜻은, 전방의 사지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은 세상에 참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서 바쳐 달라”는 것이고, 성직자를 어느 자리에서나 상석에 앉히는 뜻은, 성직이 벼슬이어서가 아니라, “윗자리를 탐할 줄 모르는 새 질서를 세상에 가져오는 자”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비좁은 사택과, 패션이 지난 옷과, 가난한 식탁을 오히려 좋아하는 청빈의 사람들을 보자고 할 때, 먼저 성직자를 찾아올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들의 교회는 금년부터 닥쳐오는 경제위기에서 분명한 희망을 보여 주는 곳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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